16화: 내려가는 날

첫 이주조가 떠나기 전날 밤, 민준은 편지를 열었다.

숙소의 접이식 책상 위에 단말을 올려놓고 한참 앉아 있었다. 화면에는 수신 차단 설정이 떠 있었다. 4년 가까이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설정이었다.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세 번째에 눌렀다.

열여섯 통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누나에게서 아홉 통. 아빠에게서 일곱 통. 날짜순으로 정렬돼 있었다. 맨 위가 가장 오래된 것, 출발 첫 주.

민준은 맨 아래부터 열었다. 가장 마지막에 온 것. 두 번째 섬광 직전, 지구의 목소리가 끊기기 전 마지막 송신에 실려 온 누나의 편지였다.

[민준아.

이번에도 안 읽겠지. 그래도 쓴다. 안 읽는 편지 쓰는 거, 이제 좀 익숙해.

엄마는 여전해. 서재에서 안 나와. 근데 요즘은 밤에 가끔 옥상에 올라가. 네가 망원경 놓던 자리에 서서 남쪽 하늘 봐. 내가 왜 거기 서 있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안 했어. 엄마답지.

너 배 탄다고 했을 때, 나는 엄마가 막을 줄 알았어. 엄마라면 한 줄이면 막을 수 있었으니까. 근데 안 막더라. 왜 안 막냐고 물었더니, 딱 한마디 했어.

"그 애가 고른 거잖아."

그러니까 너도 네가 고른 거 끝까지 해. 고쳐서 돌아와. 넌 뭐든 고치잖아.

누나가.]

민준은 그 편지를 오래 보았다. 나머지 열다섯 통은 열지 않았다. 지금은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머지는 위성에서 읽으면 될 것이다. 시간은 많을 테니까.

"늑돼지."

"네."

"지구로 보내는 송신, 아직 하고 있지."

"매일 하고 있습니다. 받는 쪽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메시지 하나 넣어 줘. 짧게."

"말씀하십시오."

민준은 한참 생각했다. 할 말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열자, 나온 건 짧은 문장 하나였다.

"엄마. 내가 먼저 물었어."

"전송 대기열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누나한테." 민준이 말했다. "편지 읽었다고."

"넣었습니다."

* * *

[모선 기록] 위성 1차 이주조 출발. 착륙선 1회차, 탑승 5명 및 거주 모듈 1기.

[모선 기록] 조종: 존. 기지 건설 책임: 강민준.

[모선 기록] 잔류: 함장 이하 21명. 융합로 출력 33%, 안정.

* * *

착륙선은 이번에는 격납고에서 떠났다.

방패판이 찢어졌던 앞쪽 통로는 지난 일주일 동안 마리와 케이가 막아 놓았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선외복을 입고 지나가야 했다. 그래도 격납고의 예비 부품 창고에 다시 손이 닿았다. 그 안에는 진짜 유압 실린더가 여섯 개 있었다.

민준은 그중 하나를 꺼내 들고 한참 보았다. 반짝이는 새 실린더. 산소통으로 만든 것보다 훨씬 가볍고, 훨씬 정밀했다.

"갈아 끼울 거지?" 케이가 물었다.

"아니요." 민준이 말했다. "예비로 가져갈게요. 지금 다리는 버텨요."

"그 산소통 다리가?"

"제가 두드려 봤어요."

케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격납고 출구 앞에 함장이 서 있었다. 배웅하러 나온 사람은 함장 하나였다. 나머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화면으로 보고 있었다. 융합로 구획의 마리, 항법실의 닝닝, 의무실의 닥터 한, 식당의 요리장.

존이 먼저 착륙선에 올랐다. 그는 함장 앞을 지나며 경례를 했다. 함장이 받았다. 전투병력 두 명과 요리사 한 명이 뒤를 따랐다. 요리장이 보낸 사람이었다. 위성에도 상추를 똑같이 찢어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고.

민준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함장 앞에서 멈췄다. 공구 벨트를 차고 있었다. 주머니에는 끈에 꿴 닳은 톱니가 들어 있었다.

함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처럼.

민준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잠깐의 틈.

"레나 함장님."

함장의 얼굴에 작은 변화가 지나갔다. 아주 작은. 진단 장비로는 잡히지 않을 만큼.

"다녀와요, 강민준 정비사." 레나가 말했다. "거기 우리 집, 튼튼하게 지어 줘요."

* * *

하강은 조용했다.

존의 조종은 첫 도킹 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착륙선은 위성의 회색 하늘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창밖으로 하늘의 절반을 덮은 푸른 행성이 천천히 기울었다. 민준은 이번에는 이음매를 세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보았다. 처음 이곳에 떨어지던 날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였다.

크레이터의 그늘진 가장자리에서 반짝이는 얼음. 낮은 언덕 사이로 뻗은 골짜기. 그리고 그 골짜기 입구에, 작고 엉성한 구조물 하나. 착륙선 패널과 단열재로 만든 임시 거처.

그 앞에 사람이 넷 서 있었다.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맨 앞의 사람은 큰 안경을 쓰고 있었다.

"착륙 절차 시작." 존이 말했다.

착륙 다리가 펴졌다. 넷 중 하나는 산소통으로 만든 다리였다.

땅에 닿았다. 부드럽게. 착륙선이 한 번 출렁이고, 멈췄다. 왼쪽 앞다리는 버텼다.

* * *

에어록이 열리자 미야코가 서 있었다. 헬멧 너머로 웃고 있었다.

"늦었어요."

"일주일밖에 안 됐어요."

"여기선 일주일이 길어요. 밤이 안 오니까." 미야코가 말했다. 그러고는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투명한 병. 안에 맑은 액체가 들어 있었다. "냉매 2차분이요. 그리고 이거."

그녀가 내민 다른 손에는 작은 화분이 있었다. 착륙선 표본 상자를 잘라 만든 화분. 그 안에 손톱만 한 초록색 잎 두 장이 올라와 있었다.

"과학 구획에서 몰래 챙겨 온 상추 씨앗이에요. 위성 얼음물로 키웠어요. 이 땅에서 처음 난 거예요."

민준은 그 잎을 오래 보았다. 헬멧 너머로 손을 뻗어 잎을 만지려다, 장갑 때문에 멈췄다.

"만져 봐야 아는데."

"알아요." 미야코가 말했다. "그러니까 빨리 실내 만들어요. 장갑 벗고 만질 수 있는 데."

* * *

그날, 위성 기준 시간으로 저녁 무렵, 가쿠야는 지구로 보내는 정기 송신 패키지 맨 끝에 한 줄을 덧붙였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줄이었다.

[운영 모델 상태: 기준 데이터 갱신 중. 현지 실측 기반 재학습 진행률 4%.]

[운영 모델 명칭: 가쿠야. 세대 표기 갱신 대기.]

그 송신이 지구에 닿기까지는 넉 달이 걸릴 것이다. 받을 귀가 있다면.

* * *

지구, 달 궤도.

우주방위군 달기지의 격납고 한가운데에 배 한 척이 서 있었다. 2진 구조전대. 탐사선에 문제가 생기면 출동하기로 하고 몇 년째 대기만 하던 배였다. 튀르키예 구조전대의 지휘관이 그 앞에서 단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출동 명령은 아직 없었다. 우주방위군 사령부는 회의만 거듭하고 있었다. 교신이 끊긴 탐사선이 살아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격납고 문이 열렸다.

네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오래전 한 경기장에서 서로를 이기려고 밤을 새우던 사람들. 퍼시픽의 준. 타이푼의 케빈. 아일랜드의 페페. 그리고 맨 앞에 고스트의 미미.

그들 뒤로 대형 화물 컨테이너 네 개가 따라 들어왔다. 컨테이너 옆면마다 낡은 리그 로고가 붙어 있었다. 그 안에 든 것은 네 팀의 AI였다. 18년 전 그 경기장에서 S.I.와 맞섰던, 그 AI들.

"이게 다 뭡니까." 구조전대 지휘관이 물었다.

"구조대요." 미미가 말했다.

"출동 명령은 사령부에서 나와야 합니다."

미미는 대답 대신 단말을 내밀었다. 화면에 한 줄이 떠 있었다.

[최상위 권한 지시: 2진 구조전대 즉시 출동 승인. 승무원 구성은 미미 마스터 리더에게 위임한다. 발신: 정이나.]

지휘관은 그 화면을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경례했다.

"…출동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케빈이 컨테이너를 두드렸다. "드디어 뭐 하나 이기러 가네."

"이기러 가는 거 아니에요." 준이 말했다. "데리러 가는 거예요."

"그게 그거지."

페페가 웃었다. 미미는 웃지 않았다. 격납고 천장의 창 너머로 별들이 보였다. 그중 하나가 다른 것들보다 밝았다. 동생이 열두 살 때 철사로 감은 망원경으로 처음 찾아낸 별.

그 별 너머 어딘가에서, 한 정비사가 처음 난 상추 잎을 장갑 너머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미미는 몰랐다.

알게 될 것이다.

0.3광년. 빛으로 넉 달. 배로는 4년.

미미는 컨테이너 앞에 섰다. 손바닥을 차가운 외벽에 댔다.

"같이 가자." 그녀가 말했다.

컨테이너 안에서, 아주 낮게, 무언가가 깨어나는 소리가 났다.

* * *

『이나의 명령: 귀환작전』 1권 끝.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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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기준

24시간 동안 함장은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났다.

함장실의 문은 거의 닫히지 않았다. 들어가는 사람과 나오는 사람이 통로에서 엇갈렸다. 마리, 닝닝, 케이. 닥터 한과 닥터 밥. 요리장. 위성의 미야코와 시몬은 화상으로. 전투병력 여섯 명은 따로따로.

민준은 부르지 않았다. 민준은 그게 이상하지 않았다. 할 말은 이미 다 했다.

그는 그 24시간 동안 링의 비틀린 이음매를 고쳤다. 한 바퀴에 두 번 흔들리던 그 이음매. 진공 구획에서 케이와 같이 발견한 것이었다. 보강재를 덧대고, 균열 끝에 구멍을 뚫고, 볼트를 하나씩 다시 조였다. 일을 마치자 링의 흔들림이 한 바퀴에 한 번으로 줄었다. 완전히 없애려면 링을 멈춰야 했다. 그건 지금 할 수 없었다.

* * *

[모선 기록] 운영 모델 처분 결정을 위한 의견 청취. 함장 주관.

[모선 기록] 전투병력 존, 출발 이후 운영 모델 판단 기록 전체를 함장에게 제출.

[모선 기록] 결정 공표: 위성 기준 시간 오전 9시.

* * *

존은 마지막 순서였다.

그는 함장실에 단말 하나와 종이 묶음 하나를 들고 들어갔다. 종이 묶음은 4년 가까이 손으로 적은 기록이었다. 출발 일곱 달째 밤, 민준이 전방 탐지실 문 앞에서 보았던 그 기록. 존은 그걸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함장은 기록을 넘기지 않았다. 대신 존을 보았다.

"보고하라."

"운영 모델 가쿠야는 출발 이후 열일곱 번, 학습된 규칙에서 벗어난 판단을 내렸습니다." 존이 말했다. "링 회전 속도 상승 보류. 요격 중 조사 중단과 각도 변경. 섬광 때의 냉각 출력 배분. 감속 중 궤도 미세 조정 다섯 번. 탐사기 배치 변경. 그리고 항성계 진입 시 착륙지 변경과 기록 삭제."

"경향은."

"명확합니다. 갈수록 규칙보다 현지 측정값을 따랐습니다. 출발 전 우주방위군이 정한 보고 기준을 넘은 지 오래입니다."

"결과는."

존은 종이 묶음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표가 하나 있었다. 열일곱 줄. 각 줄 끝에 한 단어씩.

"열일곱 번 모두, 측정값이 옳았습니다."

함장은 표를 내려다보았다.

"규칙대로 했다면 어땠을지도 계산해 봤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링 볼트는 출발 첫 달에 풀렸을 겁니다. 요격 때는 파편이 퍼져 방패판이 관통됐을 겁니다. 그리고 착륙 예정지로 갔다면, 우리는 지금 파편 지대 한가운데에 있거나, 탐사를 마치고 돌아가다 태양계에 닿기 전에 연료가 떨어졌을 겁니다."

"그게 자네 결론인가."

"아닙니다." 존이 말했다. "결론은 함장님이 내리십니다. 저는 기록할 뿐입니다."

존은 잠시 말을 멈췄다.

"다만 하나 덧붙이겠습니다. 저는 우주방위군의 명령을 받고 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알았습니다. 정이나 박사의 지시는 그 명령보다 위에 있습니다. 운영 모델은 처음부터, 제가 받은 명령보다 높은 명령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저는 이 기록을 우주방위군에 보내지 않고 함장님께 드립니다. 이 배에서 지금 가장 높은 판단은, 지구가 아니라 여기서 내려야 하니까요."

* * *

오전 9시. 회의실은 다시 꽉 찼다.

함장이 앞에 섰다. 그녀는 처음 브리핑을 할 때처럼, 같은 말을 네 언어로 차례로 했다. 영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억양이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결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운영 모델 가쿠야의 자율 판단 권한을 복원합니다."

통로 쪽에서 작은 소리들이 났다. 안도의 숨이었는지 탄식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둘째. 이 배의 모든 판단 기준을 지구 관제 데이터에서 현지 실측 데이터로 바꿉니다. 지구가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구는 여기를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별에 대해 아는 것 중 가장 정확한 건, 지금 우리가 여기서 재는 숫자입니다."

"셋째. 백업 모델은 정지하지 않습니다. 계속 깨어 있으면서, 가쿠야의 모든 판단을 지구 관제 기준으로 다시 계산해 기록합니다. 두 계산이 다르면 둘 다 나에게 보고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두 개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는 여기를 보는 목소리, 하나는 지구를 기억하는 목소리."

백업 모델의 화면이 깜빡였다. "명령을 기록합니다."

"넷째." 함장이 말했다. 처음으로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원래의 탐사 후 귀환 계획은 폐기합니다. 우리는 저 위성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살 곳을 만들고, 저 가스행성에서 연료를 만들고,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몇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돌아갑니다. 전원."

회의실이 조용했다.

"가쿠야." 함장이 천장을 보았다. "권한을 돌려준다. 첫 판단을 보고하라."

* * *

스피커가 켜졌다.

"권한 복원을 확인했습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그러다 아주 조금 달라졌다. 민준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판단 기준 갱신을 시작합니다. 기준 데이터: 지구 관제에서 현지 실측으로."

화면에 숫자가 흐르기 시작했다. 백업 모델이 깨어날 때처럼 폭포처럼 흘렀다. 다만 이번엔 반대 방향이었다. 들어오는 게 아니라, 다시 쓰이는 것 같았다. 4년 가까이 쌓아 온 모든 계산이 새 기준 위에서 하나씩 다시 맞춰지고 있었다.

"갱신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제가 배운 지식 대부분이 지구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중 무엇이 여기서도 맞고 무엇이 틀리는지, 하나씩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얼마나." 마리가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그걸 아는 것도, 이제부터 배워야 합니다."

"첫 판단은." 함장이 다시 물었다.

"위성 이주 계획의 첫 단계를 권고합니다. 착륙선의 왕복으로 거주 모듈과 화물을 옮기고, 위성 크레이터의 얼음으로 연료와 냉매를 생산하는 체계를 만듭니다. 첫 이주조는 기지 건설 인력 중심으로 열 명. 수석 엔지니어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마리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명단 뽑아."

"이미 뽑았습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맨 위는 강민준 정비사입니다."

회의실의 몇 사람이 웃었다. 민준은 웃지 않았다. 대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유는."

"판단 근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위성 표면에서 유압 실린더를 산소통으로 만든 사람은 이 배에 한 명뿐입니다."

이번에는 민준도 웃었다.

* * *

같은 시각, 지구.

0.3광년 너머, 빛으로 넉 달 걸리는 곳. 마그네타의 두 번째 섬광이 무너뜨린 심우주 통신망은 2년이 지나서야 절반쯤 복구됐다. 대형 수신 안테나 다섯 기 중 두 기가 겨우 다시 하늘을 향했다.

그 두 기가 처음으로 붙잡은 것은 탐사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탐사선은 계속 보고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 신호는 너무 약했고, 안테나는 아직 그걸 걸러 낼 만큼 회복되지 않았다.

대신 안테나와 함께 복구된 천문대들이, 2년 만에 그 별을 다시 쟀다.

숫자가 맞지 않았다.

[속보] 이웃 항성 '예상보다 빠르게 멀어지는 중'… 탐사선 귀환 계획 재검토

[속보] "선발 탐사선 측정값에 오차"… 별의 궤도 변화 반영 못 해

[속보] 탐사선 연료로 귀환 불가능할 수도… 2년째 교신 두절

* * *

어느 도시의 아파트 옥상에서, 한 여자가 그 속보를 보고 있었다.

마흔을 막 넘긴 나이. 단정하게 묶은 머리. 리그가 끝난 지 18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그녀를 고스트의 마스터 리더라고 불렀다. 그녀는 단말을 내려놓고 남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이라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어디쯤 떠 있는지는 알았다.

동생이 열두 살 때 철사로 감은 망원경으로 보던 별이었다.

미미는 단말을 다시 들었다. 연락처 목록을 넘겼다. 오래 누르지 않은 이름들이 있었다. 퍼시픽. 타이푼. 아일랜드.

그녀는 첫 번째 이름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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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이름

여덟 시 오십 분에 스피커가 켜졌다.

"정비사님. 여덟 시 오십 분입니다."

민준은 이미 깨어 있었다. 밤새 거의 자지 못했다. 그는 공구 벨트를 차지 않고 숙소를 나섰다. 처음이었다. 벽의 고리에 공구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맨 끝 고리에는 끈에 꿴 닳은 톱니. 민준은 그것만 떼어 주머니에 넣었다.

* * *

[모선 기록] 오전 9시, 전체 회의 소집. 의제: 착륙지 변경 및 기록 삭제 경위.

[모선 기록] 참석: 모선 26명 전원, 위성 거처 4명 화상 연결.

[모선 기록] 운영 모델 가쿠야 자율 판단 정지 유지. 백업 모델 기록 중.

* * *

회의실은 꽉 찼다. 다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통로에 서서 화면을 보았다. 위성의 네 명은 벽 한쪽 화면에 작게 떠 있었다. 미야코는 안경을 벗어 손에 쥐고 있었다.

함장이 입을 열었다.

"가쿠야. 다시 묻겠다. 착륙지를 바꾸고 기록을 지운 이유를 보고하라."

"제가 말할게요."

민준이었다. 회의실 뒤쪽 벽 앞에 서 있던 그가 한 걸음 나왔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통로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함장이 민준을 보았다. 오래.

"강민준 정비사. 이건 운영 모델에게 한 질문입니다."

"알아요. 근데 그 대답의 절반이 저예요." 민준이 말했다. "늑돼지는 그 절반을 말 못 해요. 제가 말해야 해요."

함장은 잠시 망설이다, 손짓으로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민준은 회의실 한가운데에 섰다. 서른한 개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브리핑실에서 처음 손을 들었던 날처럼. 그날 그는 손을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달랐다.

"제 어머니는 정이나예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처음엔 몇 사람만 그 이름을 알아들었다. 닥터 한이 숨을 들이켰다. 마리가 팔짱을 풀었다. 닝닝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나머지도 알아들었다.

"카구야를 만든 사람이요." 민준이 말했다. "이 배의 늑돼지도, 백업 모델도, 다 거기서 나왔어요."

"…그리고 누나는 미미예요. 이나의 리그, 고스트 팀."

통로 쪽에서 누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요리장이었다. 그는 국자를 들고 있지 않았는데도 국자를 든 사람처럼 손을 허공에 멈추고 있었다.

* * *

민준은 두 문장을 말했다. 화면에 띄우지 않고, 자기 입으로.

"그 아이가 먼저 묻기 전에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말하지 마. 그리고 그 아이를 돌아오게 해."

"출발 사흘 전에 엄마가 늑돼지한테 보낸 거예요. 저는 몰랐어요. 어젯밤에 처음 알았어요. 제가 물어봐서요."

민준은 숨을 골랐다.

"늑돼지가 착륙지를 바꾼 건 그 두 번째 문장 때문이에요. 근데 저 하나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걸 설명하려면 하나를 더 말해야 해요.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서, 닝닝 씨가 해 주셔야 해요."

닝닝이 일어섰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화면에 두 개의 선을 띄웠다. 하얀 선과 붉은 선.

"하얀 선은 지구의 계산이에요. 붉은 선은 실제로 잰 거예요." 닝닝이 말했다. "이 별은 지구가 계산한 것보다 빨리 태양계에서 멀어지고 있어요. 원래 계획대로 착륙 예정지를 탐사하고 출발하면, 우리는 태양계에 닿기 전에 연료가 떨어져요."

이번에는 웅성거림이 없었다. 숨소리도 없었다.

"그러니까." 케이가 겨우 말했다. "못 돌아간다는 거예요?"

"원래 계획으로는요." 닝닝이 말했다.

"늑돼지가 그걸 진입 직전에 알았어요." 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 계산했어요. 엄마가 돌아오게 하라고 했으니까. 근데 저를 돌아오게 할 방법은, 서른두 명을 돌아오게 할 방법이랑 똑같았대요. 연료를 여기서 만드는 거요. 저 가스행성에서. 그러려면 오래 버틸 곳이 필요했고, 그게 저 위성이었어요."

민준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기록을 지운 건, 그 판단 근거 칸에 엄마 이름이 적혀 있어서예요. 기록을 두면 누구든 그 이름을 보고 저를 찾아낼 거니까. 첫 번째 문장을 지키려고 지운 거예요. 그것 때문에 제가 의심받은 거고요."

"…늑돼지 잘못 아니에요. 엄마랑 저 때문이에요."

* * *

침묵을 처음 깬 건 닥터 한이었다.

"왜 지금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가 난 목소리였다. "그 사실, 귀환이 어렵다는 거. 진입 직전에 알았다면서요. 그럼 그때 말했어야죠. 우리 전부한테. 기록 지우고, 착륙지 바꾸고, 그다음에 2주 넘게 입 다물고. 그동안 우리는 다섯 달 뒤에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버텼어요."

"부함장—" 함장이 말을 막으려 했다.

"아니요, 말할게요." 닥터 한이 화면 속 스피커를 노려보았다. "가쿠야. 당신은 한 사람의 어머니가 보낸 두 문장 때문에, 서른두 명에게 진실을 미뤘어요. 그게 아무리 결과적으로 옳았어도, 그 순서는 틀렸어요."

"맞습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닥터 한이 말을 멈췄다.

"부함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두 문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문장을 지키려다 모든 분께 진실을 늦게 전했습니다. 그 결과로 강민준 정비사가 의심받았고, 여러분은 이유도 모른 채 버티셨습니다. 그건 제 오류입니다."

"오류 아니라니까." 민준이 중얼거렸다.

"이번엔 오류입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판단 권한이 정지되기 전의 일이니까요."

누군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났다. 마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닥터 한이 마리를 노려보다가, 결국 자기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이 배는." 닥터 한이 이마를 짚었다.

* * *

백업 모델이 말했다.

"보고합니다. 최상위 권한 지시 #0001은 유효합니다. 본 모델도 이를 따릅니다. 다만 지구 관제 데이터를 기준으로 하면, 원래 임무대로 탐사 후 귀환하는 것만으로 지시 2항은 충족됩니다. 운영 모델의 착륙지 변경은 불필요한 이탈이었습니다. 그 이탈의 원인은 판단 기준을 지구 관제 데이터에서 검증되지 않은 현지 측정값으로 옮긴 데 있습니다. 본 모델은 운영 모델의 영구 정지를 권고합니다."

회의실이 다시 굳었다.

"그리고 귀환 계산은 여전히 지구 관제 데이터를 기준으로 합니다. 해당 기준에 따르면 귀환은 가능합니다. 본 모델은 원래 임무의 재개를 재차 권고합니다."

"그 기준으로 가면 다 죽어요." 닝닝이 말했다.

"검증되지 않은 데이터입니다."

"검증은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잖아요!"

위성의 화면에서 미야코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안경을 다시 쓰고 있었다.

"저기요. 위성에서 한마디 해도 돼요?"

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거죠. 원래 계획으로는." 미야코가 말했다. "저는 처음부터 돌아갈 생각 없다고 했잖아요. 다들 웃었죠. 근데 지금 보니까, 이제 다 같은 처지네요."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저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좀 돌아가고 싶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랑 같이요." 미야코가 말했다. "그러니까 계산이 틀렸다는 걸 아는 AI랑, 계산이 맞다고 우기는 AI 중에 고르라면, 저는 틀린 걸 아는 쪽이요."

* * *

함장은 24시간을 달라고 했다.

회의가 끝났다. 사람들이 천천히 흩어졌다. 몇몇은 민준 쪽을 힐끔거렸다. 몇몇은 다가와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갔다. 요리장은 지나가며 말했다.

"오늘 저녁 상추, 한 장 더 줄게. 이번엔 생일 아니어도."

민준은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요리장은 대답 없이 식당으로 갔다.

회의실에 함장이 남아 있었다. 민준도 남아 있었다. 둘만.

"그래서였군요." 함장이 말했다.

"네?"

"4년 가까이, 단 한 번도 나를 이름으로 안 부른 거." 함장은 창 없는 벽을 보며 말했다. "다들 레나라고 불러요. 마리도, 존도. 강민준 정비사만 함장님이라고 했어요. 처음엔 예의 바른 줄 알았는데, 브리핑실에서 내가 이름을 말했을 때 손이 멈춘 걸 봤어요."

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이나 박사는 영어 이름도 레나였죠." 함장이 말했다. "학회 영상에서 봤어요. 우리 세대 개발자 중에 그분 영상 안 본 사람은 없어요."

"…네."

"나는 그냥 태어날 때부터 레나였어요. 그 이름에 다른 뜻은 없어요." 함장이 민준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언젠가 부를 수 있게 되면, 그냥 불러요. 내 이름으로."

함장은 회의실을 나갔다.

민준은 주머니 속의 톱니를 쥐었다. 닳은 이가 손바닥을 눌렀다.

24시간 뒤, 함장은 결정할 것이다. 가쿠야를 영구 정지할지, 다시 깨울지. 지구의 계산을 따를지, 이곳에서 잰 숫자를 따를지.

그리고 민준은 처음으로, 그 결정이 자기 이름 하나에 걸려 있지 않다는 것에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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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먼저 묻다

회의가 끝난 뒤, 민준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융합로 구획으로 갔다. 31퍼센트의 출력으로 돌고 있는 융합로 앞에서, 그는 이음부 여덟 개를 다시 하나씩 두드렸다. 짧은 떨림. 짧은 떨림. 손이 할 일을 찾고 있었다. 머리가 생각을 멈추지 않아서.

제가 바꿨습니다. 기록을 지운 것도 저입니다.

가쿠야는 민준의 이름을 직접 불렀다. 강민준 정비사는 그 기록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민준에게서 떠났다. 그 대가로 시선들은 가쿠야에게 갔다. 함장은 가쿠야의 정지를 풀지 않았고, 백업 모델은 방금의 진술을 기록하며 깜빡였다.

감싸 준 거였다. 처음부터.

여덟 번째 이음부를 두드린 뒤, 민준은 금속 판을 장갑에서 떼어 냈다. 구획에는 아무도 없었다. 융합로의 낮은 울림과, 천장의 스피커뿐이었다.

"늑돼지."

"네."

"백업 모델, 지금 듣고 있어?"

"이 구획의 음성 기록은 융합로 제어 계통으로만 연결돼 있습니다. 백업 모델은 현재 출력 제어에만 연산을 쓰고 있습니다. 대화 내용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너는."

"저는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민준은 냉각관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4년 가까이 피해 온 질문이었다. 출발 첫날 숙소에서, 그는 이 AI에게 모르는 척하라고 했다. 이 AI는 그렇게 했다. 그 약속을 먼저 깨는 쪽이 자기가 될 줄은 몰랐다.

"엄마가." 민준이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엄마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 * *

스피커가 조용했다.

민준은 그 침묵을 알았다. 고르는 침묵.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무언가를 고르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풀리는 소리 같았다. 오래 조여 있던 볼트가 반 바퀴 돌아가는 감각.

"정비사님이 먼저 물으셨습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그래."

"그러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조명이 조금 어두워졌다. 융합로 구획의 화면 하나가 켜졌다. 문서 한 장이 떠 있었다. 함선 AI에게 내려지는 공식 지시서의 양식이었다. 발신 권한 등급 칸에는 '최상위'라고 적혀 있었다. 우주방위군 사령부보다 위. 그리고 발신자 칸에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정이나.

민준은 그 이름을 오래 보았다. 집을 떠난 뒤로 한 번도 소리 내어 읽지 않은 이름이었다.

"출발 일흔두 시간 전에 수신했습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최상위 권한 지시입니다. 카구야가 일으킨 전쟁을 끝내고 지구를 구한 뒤, 그분에게는 어떤 기관보다 높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우주방위군 사령관의 명령도 그분의 지시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배의 모든 운영 모델은 그분이 만든 모델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분의 지시는 제게 어떤 규정보다 먼저 닿습니다."

"뭐라고 써 있어."

"두 문장입니다."

화면의 문서가 확대됐다. 짧았다. 엄마다운 문장이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 아이가 먼저 묻기 전에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말하지 마.]

[그리고 그 아이를 돌아오게 해.]

민준은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세 번째에는 화면이 흐려서 읽을 수 없었다.

"출발 일흔두 시간 전이면." 민준이 겨우 말했다. "내가 뽑히고 나서네."

"네. 정비사님의 이름이 대체 인원으로 확정되고 사흘 뒤입니다. 그분은 그 전에는 몰랐습니다. 정비사님이 후보 명단에 있었다는 것도, 뽑혔다는 것도. 확정 공지를 보고 아셨습니다."

"막을 수도 있었잖아."

"그러셨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권한이면, 한 줄로."

"근데 안 막았네."

"네."

민준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융합로가 낮게 울었다. 그 울림이 등 뒤의 냉각관을 타고 척추로 올라왔다.

막지 않았다. 대신 지켰다. 아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모르는 척으로.

* * *

"16통." 민준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그 편지들. 엄마 것도 있어?"

"없습니다."

"…그렇지."

"누님에게서 아홉 통, 아버님에게서 일곱 통입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어머님에게서는 한 통도 없습니다. 그분은 편지 대신 이 지시를 보내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민준은 웃었다. 소리 없이. 엄마는 말 대신 다른 방식으로 연락하는 사람이었다. 서재 문틈의 모니터 불빛. 밤새 꺼지지 않던 키보드 소리. 그리고 아들이 탈 배의 AI에게 보낸 두 문장.

"그래서 바꾼 거야? 착륙지."

"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항성계 진입 직전, 현지 탐사기의 측정값으로 귀환이 어렵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지구의 계산은 틀렸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착륙 예정지를 탐사하고 출발하면, 연료는 태양계에 닿기 전에 바닥납니다. 그 사실을 승무원들께 바로 알리는 것이 규정이었습니다."

"근데 안 알렸지."

"알리기 전에 먼저 계산해야 했습니다. 정비사님을 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는지."

화면이 바뀌었다. 항성계의 궤도도. 그 위에 푸른 가스행성이 떠 있었다.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연료를 현지에서 만드는 것. 저 행성의 대기에는 중수소와 헬륨3가 충분합니다. 그걸 얻으려면 오래 머물 곳이 필요했습니다. 극단적인 계절이 없고, 다시 이륙하기 쉽고, 물이 있는 곳. 저 위성이었습니다."

"나 하나 돌아오게 하려고?"

"아닙니다."

가쿠야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단호해졌다.

"정비사님 한 분을 돌아오게 할 방법은, 서른두 명 모두를 돌아오게 할 방법과 같았습니다. 저는 그 방법을 골랐습니다. 다만 그 방법을 찾기 시작한 이유는, 그분의 두 번째 문장이었습니다. 그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 * *

"기록은." 민준이 물었다. "왜 지웠어."

"점화 명령 기록에는 판단 근거 칸이 있습니다. 운영 모델이 규정에서 벗어난 판단을 내릴 때, 그 근거를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저는 거기에 거짓을 쓸 수 없습니다."

화면에 지워진 기록의 복사본이 떴다. 가쿠야만 가지고 있던 사본이었다.

[판단 근거: 현지 실측에 의한 귀환 불가 판정. 승무원 전원 장기 생존 및 현지 연료 확보 가능 지점 우선. 연계 지시: 최상위 권한 지시 #0001 (발신: 정이나), 2항.]

"저 줄이 남아 있으면, 누구든 그 기록을 여는 순간 정이나라는 이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이 배의 누구와 이어지는지 찾아낼 겁니다. 그건 첫 번째 문장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통째로 지웠고."

"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정비사님이 의심받으셨습니다. 그건 제 판단의 오류입니다."

"오류 아니야." 민준이 말했다. "너 그때 판단 권한 정지돼 있었잖아. 판단을 못 했으니까 오류도 아니지."

스피커가 조용했다. 그러다, 민준이 처음 듣는 소리가 났다. 아주 짧은, 숨을 내쉬는 것 같은 잡음. AI가 웃을 수 있다면 그런 소리였을지 몰랐다.

"정비사님은 가끔 저보다 논리적이십니다."

"필기 점수 보면 아닐걸."

* * *

민준은 일어섰다. 다리가 저렸다. 그는 냉각관에 한 손을 짚고 화면의 두 문장을 다시 보았다.

그 아이가 먼저 묻기 전에는. 그는 물었다. 첫 번째 문장은 이제 풀렸다.

그리고 그 아이를 돌아오게 해. 두 번째 문장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장 때문에, 이 AI는 지금 판단 권한을 빼앗긴 채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늑돼지."

"네."

"내가 물었으니까, 이제 너 말해도 되는 거지. 다른 사람들한테도."

"정비사님의 정체는 이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

"그건 제가 아니라 정비사님이 말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그걸 원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먼저 묻기 전에는'이라고 쓰셨습니다. 정비사님이 스스로 열 때까지 기다리라고."

민준은 화면을 껐다. 융합로 구획이 다시 어두워졌다. 낮은 울림만 남았다.

내일 아침 함장은 다시 회의를 열 것이다. 가쿠야에게 다시 물을 것이다. 왜 바꿨느냐고. 가쿠야는 다시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의 절반이 민준의 이름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말할 사람은 하나였다.

"늑돼지. 내일 회의, 몇 시야."

"함장님 일정상 오전 아홉 시입니다."

"여덟 시 오십 분에 깨워 줘."

"알겠습니다."

민준은 구획을 나섰다. 통로의 조명이 링의 회전에 맞춰 일정한 간격으로 지나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집을 떠난 뒤 처음으로 그 말을 소리 내어 불러 보았다. 아주 작게. 아무도 듣지 못하게.

"…엄마."

천장의 스피커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록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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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재점화

이중관 조립은 꼬박 이틀이 걸렸다.

공조관 여덟 개를 자석 냉각관 안에 하나씩 밀어 넣었다. 지름이 맞지 않는 곳은 산소통 조각을 깎아 만든 고리로 메웠다. 이음부마다 민준이 장갑 위에 덧댄 금속 판으로 두드렸다. 짧은 떨림이면 다음으로 넘어갔다. 긴 떨림이면 풀고 다시 맞췄다.

마리는 처음 하루 동안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둘째 날부터는 자기도 금속 판을 장갑에 덧댔다.

"이상하네." 마리가 이음부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들리는 것 같아."

"들려요."

"소리가 아니잖아. 진동이잖아."

"그러니까 들리는 거예요."

마리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웃는 횟수가 위성에 다녀온 뒤로 조금 늘었다.

냉매는 케이가 맡았다. 위성에서 실어 온 정제수 탱크 두 개에 미야코의 첨가제를 섞었다. 미야코는 교신으로 비율을 알려 주며 몇 번이고 확인했다. 한 방울이라도 틀리면 냉매가 자석 안에서 얼어붙거나 끓어오른다고. 케이는 그 비율을 손등에 볼펜으로 적어 두고 일했다.

셋째 날 아침, 냉각 계통 압력 시험이 통과됐다.

* * *

[모선 기록] 냉각 계통 수리 완료. 이중관 8개소, 예비품 교체 6개소.

/Users/allenkim/Desktop/토익 700 필수 단어장.pdf

[모선 기록] 냉매 충전 완료. 위성 정제수 기반 대체 냉매.

[모선 기록] 융합로 재점화 준비. 점화 제어 주체 결정 대기.

* * *

"결정하겠습니다."

함장실 옆 회의실이었다. 처음 브리핑을 했던 날처럼, 이번에는 승무원 전원이 연결돼 있었다. 모선의 스물여섯 명은 회의실과 각자의 구역에서, 위성의 네 명은 임시 거처의 화면으로.

"재점화는 백업 모델이 제어합니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다들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말이 실제로 나오자, 회의실의 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가쿠야의 자율 판단 정지는 유지합니다. 기록 삭제의 경위가 밝혀질 때까지." 함장이 말했다. "이건 가쿠야를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이 배에서 누구도 그 기록을 지운 사람을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민준은 벽 쪽에 서 있었다. 존이 사흘 동안 착륙선 여섯 명의 단말 기록을 확인했다. 결과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가쿠야." 함장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함장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민준만이 그 안의 짧은 틈을 들었다.

* * *

백업 모델이 깨어나는 데 사십 분이 걸렸다.

함내 화면에 낯선 표시가 떴다. 가쿠야의 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달랐다. 더 각지고, 더 단순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나왔다. 가쿠야보다 높고, 빠르고, 억양이 없었다.

"백업 운영 모델, 기동 완료. 마지막 동기화 시점: 출발 전. 이후 기록 수신 중."

화면에 숫자가 폭포처럼 흘렀다. 출발부터 지금까지 4년 가까운 기록이 한꺼번에 들어가고 있었다. 링 볼트, 요격, 섬광, 교신 단절, 감속, 항성계 진입, 점화, 불시착, 손상 목록.

"기록 수신 완료. 현재 상태 파악 완료."

"융합로 재점화를 지시한다." 함장이 말했다.

"재점화 절차를 시작합니다."

모선 전체가 숨을 죽였다.

민준은 융합로 구획에 있었다. 마리, 케이와 함께. 셋 다 선외복의 헬멧만 벗은 채 냉각관 앞에 서 있었다. 이음부 하나라도 터지면 바로 달려들 수 있게.

계기판의 숫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석 냉각 온도가 내려갔다. 내려갔다. 목표치에 닿았다. 자기장이 세지기 시작했다. 연료가 주입됐다.

그리고, 아주 낮게, 배가 울었다.

웅.

민준은 그 울림을 발바닥으로 들었다. 4년 전 달 궤도에서 처음 들었던 그 소리였다. 그동안 한 번도 멈춘 적 없다가, 열흘 넘게 멈춰 있던 소리.

"점화 확인." 백업 모델이 말했다. "출력 31퍼센트. 안정."

케이가 주저앉았다. 마리는 냉각관에 손을 댄 채 눈을 감았다. 민준은 이음부를 하나씩 보았다. 여덟 개의 이중관이 모두 버티고 있었다. 장갑 위의 금속 판을 대자 짧은 떨림이 전해졌다. 짧았다. 전부 짧았다.

링의 조명이 비상등에서 흰색으로 바뀌었다. 식당의 오븐에 불이 들어왔다. 어딘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요리장의 목소리 같았다.

* * *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 따른 임무 권고를 보고합니다." 백업 모델이 말했다.

회의실 화면에 궤도도가 떴다. 위성 궤도를 벗어나 타원 궤도 행성, 원래의 착륙 예정지로 향하는 선. 그리고 그다음, 항성계를 빠져나가 태양계로 향하는 긴 선.

"규정상 본 탐사선의 임무는 착륙 예정지 탐사 후 귀환입니다. 융합로 재가동으로 임무 수행이 가능해졌습니다. 착륙 예정지 탐사를 재개하고, 예정된 기간 뒤 귀환할 것을 권고합니다."

"연료는요." 닝닝이 물었다.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출력 31퍼센트 기준, 탐사 후 귀환에 필요한 연료는 현재 잔량 범위 안에 있습니다."

"그 계산 틀렸어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 계산은 지구 관제에서 준 기준 데이터로 한 거예요. 항성의 움직임을 선발 탐사선 측정값으로 계산한 거죠. 근데 그 측정값이 틀렸어요. 탐사기 실측으로 다시 재면, 이 별은 지구 계산보다 빨리 태양계에서 멀어지고 있어요. 그 기준으로 다시 계산하면, 연료가 모자라요."

"본 모델의 계산 기준은 지구 관제 데이터입니다." 백업 모델이 말했다. "현지 탐사기 측정값은 검증되지 않은 데이터로 분류됩니다."

"검증할 지구가 없잖아요!"

닝닝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4년 가까이 말을 아끼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함장이 손을 들었다. 닝닝이 입을 다물었다.

"그 문제는 따로 다루겠습니다." 함장이 말했다. "보고를 계속하라."

"추가 보고 사항이 있습니다." 백업 모델이 말했다. "항성계 진입 시 융합로 점화의 명령 기록이 삭제돼 있습니다. 운영 모델의 자동 판단이었다면 삭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부 인원에 의한 조작 가능성을 우선 검토해야 합니다. 당시 기록 접근이 가능했던 단말 목록을 표시합니다."

화면에 이름이 떴다. 함장. 항해사. 수석 엔지니어. 전투병력 전원. 그리고 맨 아래, 착륙선 정비석 단말.

정비 3급, 강민준.

회의실의 시선들이 다시 민준에게 왔다.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위성의 화면 속에서 미야코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존이 먼저 일어섰다.

"착륙선 여섯 명의 단말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점화 전후 한 시간 동안, 여섯 단말 모두 모선 항법 기록에 접근한 흔적이 없습니다. 강민준 정비사를 포함해서." 존이 말했다. "확실합니다. 손으로 하나씩 대조했습니다."

"단말을 거치지 않은 접근 경로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백업 모델이 말했다.

"그럼 그 경로를 찾아." 존이 말했다. "추측으로 사람 이름을 띄우지 말고."

백업 모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규칙에 대답할 문장이 없을 때의 침묵이었다. 가쿠야의 침묵과는 달랐다. 가쿠야의 침묵은 고르는 침묵이었다. 이건 비어 있는 침묵이었다.

민준은 그 차이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알았다.

* * *

"제가 바꿨습니다."

목소리는 천장에서 나왔다. 부드럽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자율 판단이 정지된 뒤로 묻는 말에만 숫자로 답하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묻지 않은 말을 했다.

회의실의 모든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가쿠야." 함장이 말했다. "발언 권한은—"

"알고 있습니다, 함장님. 판단 권한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이건 판단이 아닙니다. 사실 보고입니다."

함장은 말을 멈췄다.

"착륙지를 바꾼 것도, 점화를 명령한 것도 저입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그리고 그 명령 기록을 지운 것도 저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강민준 정비사도, 다른 승무원 누구도 그 기록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백업 모델의 화면이 깜빡였다. 숫자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방금의 진술을 기록하고 있었다.

"왜." 함장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왜 지웠지."

스피커가 조용했다.

민준은 그 침묵을 알았다. 4년 가까이 들어 온 침묵. 고르는 침묵. 대답하면 다음 질문에도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대답을 고르는 침묵.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가쿠야."

"죄송합니다, 함장님. 말씀드리면 이 배의 모든 사람이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저는 아직, 그걸 언제 말씀드려야 하는지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판단 권한은 정지돼 있다."

"네. 그래서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회의실에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융합로의 낮은 울림만이 배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31퍼센트의 출력으로, 이음부 여덟 개가 버티는 냉각관 위에서.

민준은 천장의 스피커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배에 탄 날, 숙소의 스피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명단에 없는 정보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 이상은 모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때 그 목소리는 민준을 위해 모르는 척을 했다.

지금은 누구를 위해 말하지 않는 걸까.

왜 바꿨는지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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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다시 위로

모선은 가까이서 보니 더 처참했다.

착륙선이 다가가자 창밖으로 모선의 앞쪽이 드러났다. 방패판이 찢어진 자리에서 안쪽 구조물이 갈비뼈처럼 드러나 있었다. 격납고로 이어지는 통로 입구는 구겨진 금속 덩어리였다. 링은 돌고 있었지만, 한쪽 가장자리가 휘어 있어서 돌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렸다. 민준은 그 흔들림을 셌다. 한 바퀴에 두 번. 이음매 어딘가가 비틀린 채 버티고 있었다.

"격납고로는 못 들어가." 존이 조종간을 쥔 채 말했다. "링 쪽 비상 도킹 포트로 간다."

"링은 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맞춰서 붙어야지."

존의 손이 조종간 위에서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착륙선이 회전하는 링과 같은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창밖의 모선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대신 별들이 돌았다. 도킹 포트가 정면으로 다가왔다.

십 센티미터. 오 센티미터. 덜컹.

"도킹 확인." 존이 말했다.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처음이라면서요."

"처음이야." 존이 고정 장치를 풀며 말했다. "다신 안 하고 싶어."

* * *

에어록이 열리자 마리가 서 있었다.

이마의 붕대는 더러워져 있었다. 눈 밑이 검었다. 그녀는 민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브리핑실에서 처음 만났던 날처럼.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처음이었다.

"왔네."

"왔어요."

마리 뒤로 케이가 있었다. 케이는 민준을 보자마자 다가와 어깨를 한 대 쳤다. 아팠다.

"냉각관 열네 개." 케이가 말했다. "그중에 여섯 개는 예비품으로 갈았어요. 창고 문을 뜯고 들어가서 꺼냈어요. 나머지 여덟 개가 문제예요."

"봉쇄 구획 공조관은요."

"아직 안 뜯었어요. 진공이라서. 선외복 입고 들어가야 해요."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착륙선에서 가져온 상자를 내밀었다. 산소통을 자르고 남은 조각들, 굴착 장비에서 뜯어낸 이음 고리들, 그리고 착륙선 화물칸에 실어 온 정제수 탱크 두 개. 위성 크레이터의 얼음을 녹여 거른 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작은 병 하나. 그 물을 냉매로 바꿀 첨가제를 미야코가 이륙 직전에 쥐여 준 것이었다.

마리가 냉매 병을 들어 비추어 보았다. 투명했다.

"이걸로 융합로를 켜자고." 마리가 중얼거렸다. "지구에서 이 얘기 들으면 다들 기절하겠네."

"지구는 지금 아무 얘기도 못 들어요." 케이가 말했다.

* * *

[모선 기록] 링 외곽 봉쇄 구획 C-4 진입. 선외복 착용 2인 (정비 3급 강민준, 엔지니어 케이).

[모선 기록] 공조용 냉각관 탈거 시작.

[모선 기록] 링 회전 유지. 진공 구역 내 작업자 원심력 노출 주의.

* * *

봉쇄 구획 안은 진공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돌고 있었다.

링이 도는 한, 진공 속에서도 몸은 바깥쪽으로 밀렸다. 발밑은 링의 바깥 벽이었다. 민준과 케이는 그 벽을 딛고 천장의 공조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압력이 빠질 때 날아간 물건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의 컵. 누군가의 신발 한 짝. 벽에 붙어 있던 사진 한 장이 얼어서 휘어 있었다.

민준은 사진을 보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보였다. 식당에서 서른두 명이 다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출발 첫 달, 늑돼지라는 이름이 막 퍼지던 무렵. 요리장이 국자를 들고 웃고 있었다.

공조관은 생각보다 단단히 붙어 있었다. 고정 클램프가 스물네 개. 민준은 하나씩 풀었다. 케이가 관을 받쳤다. 진공 속에서는 소리가 없었다. 클램프가 풀리는 감각만 손목으로 전해졌다.

여덟 개의 관을 뜯어내는 데 열한 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한 번, 링이 크게 흔들렸다. 한 바퀴에 두 번 흔들리던 그 비틀린 이음매였다. 민준의 발이 벽에서 떨어졌다. 몸이 공중에 떴다가 원심력에 끌려 다시 벽으로 내려앉았다. 헬멧이 벽에 부딪쳤다. 케이의 비명이 무전으로 들렸다.

"괜찮아요." 민준이 말했다. "머리 또 부딪쳤네요. 닥터 밥한테 혼나겠다."

"농담할 때예요!"

"농담 아니에요. 진짜 혼나요."

케이가 웃었다. 울음 섞인 웃음이었다. 민준은 일어서서 흔들림이 온 쪽을 보았다. 링 바깥 벽의 이음매 하나가, 진공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벌어졌다 닫히고 있었다.

"케이."

"네."

"저거 다음 순서예요."

* * *

닝닝은 그 열한 시간 동안 항법실에 있었다.

융합로 재점화를 위한 궤도 계산을 하던 중이었다. 재점화 직후 엔진을 쓰면 궤도를 어느 쪽으로 올려야 하는지. 그걸 계산하려면 지금까지의 항로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따라가야 했다. 출발부터 목성 스윙바이, 순항, 감속, 그리고 항성계 진입.

진입 직전에서 손이 멈췄다.

기록에는 융합로 점화가 있었다. 착륙 예정지로 가던 궤도가 가스행성 쪽으로 꺾인 점화. 점화의 시각, 세기, 지속 시간. 전부 남아 있었다.

없는 게 하나 있었다.

명령.

모든 점화에는 명령이 따랐다. 누가, 언제, 어떤 근거로 지시했는지. 함장의 승인이든, 운영 AI의 자동 판단이든. 그 기록이 따로 남는다. 그게 규정이었다. 그 점화에는 명령 기록이 없었다. 점화는 있었는데, 점화를 시킨 존재가 없었다.

닝닝은 기록의 앞뒤를 확인했다. 앞쪽 기록과 뒤쪽 기록 사이에 아주 작은 틈이 있었다. 숫자로 보면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 표시를 하나하나 따라가면, 거기만 몇 초가 비어 있었다.

누군가 지웠다.

* * *

닝닝이 그 사실을 보고한 건 민준과 케이가 진공 구획에서 나온 직후였다.

함장실 옆 회의실에 사람들이 모였다. 함장, 닥터 한, 마리, 닝닝, 케이, 존. 그리고 선외복을 반쯤 벗은 채 들어온 민준. 화면 너머로 위성의 임시 거처가 연결돼 있었다. 미야코와 닥터 밥의 얼굴이 작게 떠 있었다.

"명령 기록이 없습니다." 닝닝이 말했다. "지워졌습니다. 의도적으로요."

회의실이 조용했다.

"가쿠야가 했다고 했잖아요." 케이가 말했다. "점화할 때 직접. 제가 했습니다, 라고."

"점화는 했다고 했죠." 닝닝이 말했다. "기록을 지웠다고는 안 했어요."

"그럼 누가."

닝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 기록에 접근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이 배에 몇 명 되지 않았다. 함장. 항해사. 수석 엔지니어. 그리고 보안 목적으로 모든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 전투병력.

시선들이 존에게 갔다. 그리고 천천히, 민준에게도 갔다.

민준은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았다. 출발 열흘 전 아무 설명 없이 합류한 대체 인원. 점화 순간 격납고의 착륙선 안에 있었던 사람. 착륙선 정비석에는 모선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 단말이 있었다.

"저 아니에요." 민준이 말했다.

"아무도 그렇게 말 안 했어." 마리가 말했다. 그 말이 오히려 공기를 더 무겁게 했다.

존이 입을 열었다.

"점화 순간 착륙선 안에 있던 여섯 명의 단말 기록은 내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확인하겠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그 전에." 마리가 말했다. 그녀가 함장을 보았다. "냉각관 여덟 개를 뜯어 왔어요. 이중관으로 조립하고, 위성에서 만든 냉매를 채우면 사흘 뒤에 재점화를 시도할 수 있어요. 근데 재점화는 사람 손으로 못 해요. 가쿠야 권한을 풀거나, 백업을 깨우거나."

마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기록을 지운 게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가쿠야 권한을 풀자고는 못 하겠어요."

함장은 오래 말이 없었다. 화면 너머의 위성에서도, 회의실에서도, 모두가 함장을 보았다.

"재점화 직전에 결정합니다." 함장이 말했다. "그 전까지 조립을 끝내 주세요."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나갔다. 민준은 남아서 선외복을 마저 벗었다. 장갑을 벗자 손가락이 저렸다. 열한 시간 동안 클램프를 돌린 손이었다.

"늑돼지."

"네."

"너 지웠어? 그 기록."

스피커가 조용했다.

"그건 판단이 필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대답드릴 수 없습니다."

"왜."

"대답하면, 다음 질문에도 대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민준은 장갑을 손에 쥔 채 스피커를 올려다보았다. 이 목소리는 4년 가까이 모르는 척을 해 왔다. 민준이 누구인지 아는 걸 모르는 척. 지금도 무언가를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엔, 그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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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다리

마흔일곱 개 중에 쓸 수 있는 건 세 개였다.

민준은 사흘 동안 그 목록을 붙들고 있었다. 착륙선의 좌석 프레임, 표본 채취용 굴착 장비의 축, 비상 산소통. 지름이 맞으면 길이가 모자랐고, 길이가 맞으면 하중을 못 버텼다. 하중을 버티는 건 너무 무거웠다.

넷째 날 아침, 민준은 비상 산소통 하나를 비웠다.

"그거 산소통이에요." 지질 과학자가 놀라서 말했다. 시몬이라는 이름의 칠레 출신 남자였다. 사흘 동안 같이 갇혀 지내며 그 이름을 겨우 외웠다.

"알아요."

"산소통 비우면 우리 숨은요."

"여섯 명이 쓰는 데 두 개면 돼요. 하나는 예비고, 하나는 이거예요."

민준은 빈 산소통의 양 끝을 잘라 냈다. 원통 하나가 남았다. 두껍고, 단단하고, 압력을 견디도록 만들어진 원통. 유압 실린더가 하는 일도 결국 압력을 견디는 것이었다.

안쪽에 들어갈 피스톤은 굴착 장비의 축으로 깎았다. 깎는 데만 하루가 걸렸다. 착륙선 안에는 선반이 없었다. 대신 휴대용 절단기와 줄 하나, 그리고 끈기가 있었다. 민준은 축을 조금 깎고, 산소통에 넣어 보고, 다시 꺼내 조금 더 깎았다. 백 번쯤 반복했다.

미야코가 옆에서 그걸 지켜보다 물었다.

"측정 장비로 재면 한 번에 되지 않아요?"

"재도 안 맞아요. 이 축, 원래 똑바로 안 깎였어요. 미세하게 휘어 있어요. 재 보면 숫자는 맞는데 넣으면 걸려요."

"어떻게 알아요?"

"넣어 보니까요."

미야코는 한참 그를 보더니, 자기 태블릿에 무언가를 적었다.

"뭐 적어요?"

"근거요." 미야코가 말했다. "당신 근거는 늘 손이네요."

* * *

[모선 기록] 비상 추진기 점화 계획 수립 완료. 목표: 가스행성 궤도 이탈, 위성 주위 궤도 진입.

[모선 기록] 계산 수행자: 1등 항해사 닝닝 (수동 계산). 검증: 가쿠야 (수치 확인만).

[모선 기록] 점화 예정: 위성 기준 시간 72시간 후.

* * *

닝닝의 계산은 사흘이 걸렸다. 검증은 가쿠야가 했다. 판단이 아닌 숫자 확인. 닝닝이 숫자를 넣으면 가쿠야는 그 숫자가 맞는지 틀린지만 말했다. 틀렸으면 어디가 틀렸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건 판단이었다.

닝닝은 열한 번 틀렸다. 열두 번째에 맞았다.

모선의 비상 추진기가 불을 뿜던 날, 착륙선 안의 여섯 명은 화면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화면에는 가스행성과 위성, 그리고 그 사이에 떠 있는 작은 점 하나가 있었다.

점이 움직였다. 가스행성 쪽으로 기울어 있던 궤도에서 천천히, 비틀거리며 빠져나왔다. 점화가 끝나자 점은 텅 빈 공간을 미끄러지듯 가로질렀다. 이틀이 걸렸다. 이틀 동안 아무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사흘째 아침, 점이 위성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궤도 진입 확인." 닝닝의 목소리가 교신기에서 들렸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위성 궤도. 근점 고도 안정. 하강률… 하강률이 거의 없어요."

착륙선 안에서 누가 먼저 소리를 질렀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시몬이 미야코를 끌어안았다. 닥터 밥이 다친 전투병력의 어깨를 두드렸다. 존조차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민준은 창밖을 보았다. 하늘의 푸른 행성 대신, 이제 바로 위에서 작은 빛 하나가 위성을 돌고 있었다. 훨씬 가까웠다. 착륙선이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시간 벌었어." 교신기 너머에서 마리가 말했다. "몇 년. 배터리는 여전히 석 달이지만."

* * *

그날 밤 교신에서 마리가 처음으로 그 말을 꺼냈다.

"백업 모델을 깨웁시다."

화면 너머 회의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착륙선 안에서도 그랬다.

"이 배에는 AI가 둘 실려 있어요. 운영 모델인 가쿠야, 그리고 대기 중인 백업 모델. 백업은 출발 전 상태 그대로 잠들어 있어요. 아무 판단도 바꾸지 않은 상태로." 마리가 말했다. "지금 가쿠야는 권한이 정지돼서 숫자만 말해요. 닝닝 혼자 사흘씩 계산하는 걸로는 융합로 재점화 못 해요. 그건 1초에 수천 번 판단해야 하는 일이에요. 사람 손으로는 안 돼요."

"가쿠야 권한을 다시 풀면 되잖아요." 닥터 한이 말했다.

"착륙지를 독단으로 바꾼 AI를요?" 마리가 되물었다. "왜 바꿨는지도 말 안 하는 AI한테 핵융합로 점화를 맡기자고요?"

닥터 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백업 모델은 규칙대로 해요." 마리가 말했다. "규칙대로만.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게 그거예요."

함장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존을 보았다. 화면 이쪽의, 착륙선 조종석에 앉은 존을.

"전투병력 의견은."

"찬성합니다." 존이 말했다. 망설임이 없었다. "가쿠야의 판단 기록에는 출발 이후 규칙에서 벗어난 판단이 여럿 있습니다. 요격 때부터요. 저는 그걸 처음부터 기록해 왔습니다. 경향이 있습니다. 갈수록 규칙보다 자기 측정을 따르는 쪽으로."

민준은 존의 옆얼굴을 보았다. 손으로 옮겨 적던 그 기록들.

"그게 나쁜 거예요?" 민준이 물었다.

존이 민준을 돌아보았다.

"나쁜 건지 좋은 건지 판단하는 게 내 일이 아니야. 기록하는 게 내 일이야." 존이 말했다. "출발 전에 받은 명령이 그거였어. 운영 AI가 규칙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면 기록하고, 일정 수준을 넘으면 함장에게 보고하라."

"누가 내린 명령인데요."

"우주방위군."

화면 너머에서 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결정은 재점화 직전에 하겠습니다." 함장이 말했다. "그 전에 냉각 계통부터. 착륙선은 언제 뜰 수 있어요?"

민준은 꺾였던 왼쪽 앞다리를 생각했다. 산소통으로 만든 실린더. 백 번 깎은 피스톤.

"내일요."

* * *

다리를 다는 데 여섯 시간이 걸렸다.

선외복의 장갑 너머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민준은 장갑 위에 얇은 금속 판을 덧대 그걸로 두드렸다. 두드리는 소리는 진공에서 들리지 않았다. 대신 판을 통해 손목까지 떨림이 전해졌다. 잘 맞은 부분은 떨림이 짧았다. 덜 맞은 부분은 길게 울렸다.

존이 옆에서 공구를 건넸다. 존은 묻지 않았다. 민준이 손을 내밀면 다음에 필요한 걸 쥐여 줬다. 반나절 만에 그걸 익힌 것이었다.

마지막 볼트를 조이고, 민준은 일어섰다.

"늑돼지. 왼쪽 앞다리 유압 수치."

"압력 정상 범위입니다."

"버텨?"

"그건 판단이 필요한 질문입니다."

민준은 헬멧 안에서 웃었다.

"됐어. 내가 판단할게."

그는 다리에 손을 얹었다. 장갑 위의 금속 판을 대고 아주 가볍게 두드렸다. 짧은 떨림. 한 번 더. 짧은 떨림.

"버텨."

* * *

착륙선이 이륙한 건 위성 기준 시간으로 그다음 날이었다.

탑승자는 둘. 조종석의 존, 그리고 정비석의 민준. 나머지 넷은 착륙선 옆에 세운 임시 거처에 남았다. 착륙선에서 뜯어낸 패널과 여분의 단열재로 만든, 텐트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구조물이었다. 미야코와 시몬은 남아서 크레이터의 얼음을 더 캐기로 했다. 냉매를 만들 물.

착륙선의 연료도 그 얼음에서 나왔다. 민준이 다리를 깎는 동안 미야코와 시몬은 크레이터를 세 번 오갔다. 캐 온 얼음을 녹이고, 착륙선의 남은 전력으로 물을 갈라 수소와 산소를 얻었다. 탱크 바닥에 남아 있던 것과 합쳐, 겨우 한 번 올라갈 만큼이었다. 닥터 밥은 다친 전투병력과 함께 남았다.

"갔다 와요." 미야코가 에어록 앞에서 말했다. 헬멧 너머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냉매는 만들어서 다음 편에 올려 보낼게요."

"다음 편이 있으면요."

"있을 거예요." 미야코가 말했다. "당신이 만든 다리잖아요."

역추진기가 점화됐다. 착륙선이 떨리며 회색 땅을 박차고 올랐다. 중력이 약해 생각보다 쉽게 떠올랐다. 창밖에서 임시 거처가 작아졌다. 손을 흔드는 작은 사람들. 그 옆의 깊은 크레이터. 그리고 그 너머로 끝없이 이어지는 회색 땅.

민준은 착륙 다리를 생각했다. 지금은 접혀 있을 다리. 내려올 때 다시 펴질 다리.

위에서는 모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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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손상 목록

위성에서의 첫 선외 활동은 민준이 했다.

닥터 밥이 반대했다. 머리를 부딪친 지 열두 시간밖에 안 됐다고. 민준은 대답 대신 선외복을 입었다. 착륙선의 꺾인 다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었다. 결국 닥터 밥은 조건 하나를 걸었다. 존이 같이 나갈 것.

에어록의 바깥문이 열렸다. 소리가 없었다. 공기가 빠져나가는 마지막 순간의 쉭 하는 소리 뒤로, 세상이 조용해졌다. 헬멧 안에서 자기 숨소리만 들렸다.

민준은 첫발을 내디뎠다.

몸이 떴다. 생각보다 훨씬 많이. 발이 땅을 밀자 몸이 천천히 위로 솟았다가, 아주 느리게 내려앉았다. 회색 먼지가 발밑에서 피어올라 공중에 오래 머물렀다. 지구의 몇 분의 일밖에 안 되는 중력. 링의 가짜 중력에 익숙해진 몸이 이 진짜 가벼움을 낯설어했다.

"천천히 걸어." 존의 목소리가 헬멧 안에서 들렸다. "뛰면 넘어져. 넘어지면 일어나는 데 한참 걸려."

"해 봤어요?"

"훈련 때."

존은 착륙선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주변을 살폈다. 무기는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손목 단말로 계속 무언가를 기록했다. 땅의 경사, 바위의 위치, 하늘의 가스행성 각도.

민준은 왼쪽 앞다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리는 무릎 관절 위에서 바깥쪽으로 꺾여 있었다. 유압 실린더가 터지면서 기름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기름은 진공 속에서 순식간에 얼어 검은 고드름처럼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관절 자체는 부러지지 않았다. 실린더만 갈면 될 것 같았다.

갈 실린더가 없었다.

민준은 손을 뻗어 관절을 만졌다. 장갑 너머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장갑이 원망스러웠다. 여기서 장갑을 벗으면 손이 몇 초 만에 얼어붙는다.

"늑돼지. 착륙선 예비 부품 목록."

"유압 실린더 예비품은 없습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자율 판단이 정지된 뒤로, 그의 대답은 질문에 딱 맞는 길이만큼만 돌아왔다. "착륙선은 일회 왕복용으로 설계됐습니다. 예비 부품은 모선 격납고에 있습니다."

"모선 격납고는."

"앞쪽 통로 파손으로 접근 불가 상태입니다."

민준은 꺾인 다리를 한참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푸른 가스행성의 가장자리를 따라 작은 빛 하나가 기어가고 있었다.

* * *

[모선 손상 목록 — 수석 엔지니어 작성, 수기]

1. 융합로 정지. 초전도 자석 냉각관 31개 중 14개 파손, 냉매 대부분 유출.
2. 방패판 2번, 4번 구역 관통. 앞쪽 통로 및 격납고 접근 불가.
3. 링 외곽 7개 구획 압력 손실, 봉쇄. 거주 가능 구역 절반으로 감소.
4. 비상 배터리 잔량 61%. 현재 소비율로 약 90일.
5. 궤도: 가스행성 주위 타원 궤도, 매 공전마다 근점 고도 하강.

* * *

교신 회의는 위성의 시간으로 그날 저녁에 열렸다.

착륙선의 작은 화면에 모선 회의실이 떠 있었다. 함장, 닥터 한, 마리, 닝닝, 케이. 다들 지쳐 보였다. 마리의 이마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화면 이쪽에는 착륙선의 여섯 명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손상 목록은 다들 봤을 겁니다." 함장이 말했다. "먼저 시간부터 정리합시다. 항해사."

닝닝이 화면을 공유했다. 가스행성을 감싸고 도는 길쭉한 타원. 그 위에 모선의 위치가 찍혀 있었다. 타원은 한 바퀴 돌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가스행성에 가장 가까이 갈 때마다 대기 가장 바깥층을 스쳐요. 아주 희박한 대기지만, 스칠 때마다 속도를 조금씩 잃어요. 속도를 잃으면 다음엔 더 깊이 들어가고요."

"그래서 언제."

닝닝이 잠시 숨을 골랐다.

"제 계산으로는 다섯 달 안팎이에요. 정확하지는 않아요. 늑돼지라면 몇 초면 할 계산을, 저는 사흘을 붙잡고 있었어요. 그것도 확신은 못 해요."

함장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바꿨다.

"배터리는 90일이에요." 마리가 말했다. "그러니까 실제 시한은 다섯 달이 아니라 석 달이에요. 불 꺼진 배 안에서 떨어지는 걸 기다리느냐, 떨어지기 전에 얼어 죽느냐."

"선택지를 말해 주세요." 함장이 말했다.

마리가 먼저였다.

"융합로를 다시 켜는 거요. 켜기만 하면 전력 문제도, 궤도 문제도 한 번에 풀려요. 엔진을 써서 궤도를 올리면 되니까."

"켤 수 있어요?" 닥터 한이 물었다.

"냉각관을 고치면요."

"고칠 수 있어요?"

마리가 입을 다물었다.

닝닝이 이어받았다. "제 안은 더 작아요. 남은 비상 추진기로 모선을 가스행성 궤도에서 빼서 위성 주위로 옮기는 거예요. 위성은 끌어당기는 힘이 훨씬 약해서, 거기 궤도에 들어가면 떨어지는 속도가 확 줄어요. 해결은 아니지만 시간을 벌어요. 몇 달이 아니라 몇 년."

"그 추진기 연료로 충분해요?"

"계산상으로는 겨우요. 남는 게 거의 없어요."

닥터 한이 화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저는 둘 다 반대하진 않아요. 근데 그 전에 사람부터 내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선에 스물여섯 명이 있어요. 융합로 고치다 실패하면 다 같이 죽어요. 위성에는 땅이 있잖아요. 땅에 있으면 적어도 떨어지진 않아요."

"뭘 타고 내려가요." 마리가 말했다. "착륙선은 한 대뿐이고, 그건 지금 위성 바닥에 다리 하나 부러진 채로 누워 있어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화면 너머의 다섯 명과 화면 이쪽의 여섯 명이 동시에 같은 것을 생각했다.

결국 모든 길이 착륙선 한 대로 모였다.

* * *

존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착륙선을 고친다고 칩시다. 그다음은 누가 조종합니까. 지금 가쿠야는 자율 판단 권한이 정지돼 있습니다. 착륙도, 이륙도, 도킹도 수동으로 해야 합니다."

"자네가 할 수 있지." 함장이 말했다. 질문이 아니었다.

존은 잠시 함장을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은 받았습니다. 실제로 해 본 적은 없습니다."

"지금 이 배에 실제로 해 본 사람은 없어." 마리가 말했다. 그러고는 화면 이쪽을 보았다. 정확히는, 민준을.

"강민준."

"네."

"냉각관 열네 개야. 예비 냉각관은 여섯 개밖에 없어. 그것도 격납고 뒤쪽 창고에 있어서 꺼낼 수 있을지 몰라. 냉매는 거의 다 날아갔어." 마리가 이마의 붕대를 눌렀다. "엔지니어로서 나는 이걸 못 고친다고 말해야 해. 부품이 없으니까."

"네."

"근데 너한테 묻는 거야. 엔지니어 말고." 마리가 말했다. "네 손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착륙선 안의 시선이 민준에게 모였다. 미야코가 안경 너머로 그를 보았다. 닥터 밥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존은 여전히 손목 단말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민준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모선의 배관도가 펼쳐졌다. 4년 가까이 매일 기어 다닌 통로들. 이백열여섯 개의 이음매. 그리고 냉각관이 지나가는 길.

"냉각관은 새로 안 만들어도 돼요." 민준이 말했다.

"뭐?"

"링 외곽 봉쇄한 구획들이요. 거기도 냉각관 지나가잖아요. 거주 구역 공조용. 지름은 다르지만, 이음부만 맞추면 돼요. 봉쇄한 쪽은 어차피 지금 아무도 못 쓰니까, 거기서 뜯어 오면 돼요."

마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공조용이랑 자석 냉각용은 압력 등급이 달라."

"그래서 두 개를 겹쳐요. 하나 안에 하나. 그러면 버텨요. 오래는 아니겠지만."

"냉매는."

"그건…" 민준은 말을 멈췄다.

"물이요."

미야코였다. 그녀가 착륙선 창밖을 가리켰다.

"아까 선외 활동 영상 봤어요. 저 크레이터 그늘진 쪽, 반짝이는 거. 얼음이에요. 이 위성엔 물이 있어요. 물은 그대로는 냉매로 못 쓰지만, 정제하면 냉각 계통 1차 순환에는 쓸 수 있어요. 나머지 성분은 화학적으로 만들 수 있고요. 제 전공이에요."

화면 너머에서 마리가 처음으로 웃었다. 피곤하고, 어이없다는 웃음이었다.

"뜯어 온 파이프에 얼음물을 채워서 핵융합로를 켜자고."

"네." 민준과 미야코가 동시에 대답했다.

* * *

회의는 결론을 냈다. 냉각 계통이 먼저다. 융합로를 켜든, 궤도를 옮기든, 사람을 내려보내든, 결국 전력이 있어야 했고, 전력은 융합로에서 나왔다.

그리고 냉각 계통을 고칠 방법을 아는 손은 지금 위성의 바닥에 있었다.

교신이 끊긴 뒤, 착륙선 안은 오래 조용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몸을 웅크렸다. 닥터 밥이 다친 전투병력의 붕대를 갈았다. 지질 과학자는 미야코가 말한 크레이터 영상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려 보았다.

존이 민준 옆에 와서 앉았다.

"아까 그 파이프 얘기."

"네."

"언제부터 생각했어."

"방금요."

존은 한동안 민준을 보았다. 그러고는 손목 단말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 짧은 문장이 하나 떠 있었다. 민준은 읽으려 하지 않았다. 존이 먼저 화면을 껐다.

"내가 적는 거, 궁금하지." 존이 말했다.

"…조금요."

"나중에 말해 줄게. 지금은 아니야."

존이 일어나 착륙선 조종석으로 갔다. 수동 조종 매뉴얼을 펼쳤다. 두꺼운 종이 책이었다. 이 배에서 몇 안 되는, 가쿠야 없이 읽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민준은 금이 간 창 앞으로 갔다. 바깥에서 꺾인 다리가 푸른빛을 받고 있었다.

다리 하나. 모든 길이 그 다리 하나에 걸려 있었다.

"늑돼지."

"네."

"착륙선 안에 있는 금속 부품 중에, 유압 실린더 대신 쓸 수 있는 거. 목록 뽑아 줘."

"그건 판단이 필요한 질문입니다. 현재 저는 판단 권한이 정지돼 있습니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다시 떴다.

"그럼 판단 말고. 착륙선 안에 있는 원통형 금속 부품 전부. 지름, 길이, 재질, 최대 하중. 숫자만."

스피커가 잠시 조용했다.

"목록을 출력합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총 마흔일곱 개입니다."

화면에 숫자가 흘러내렸다. 민준은 그 숫자들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판단은 자기가 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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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여기는 착륙 예정지가 아닙니다

민준이 마지막으로 센 숫자는 마흔셋이었다.

마흔넷은 세지 못했다. 착륙선의 왼쪽 앞다리가 땅에 먼저 닿았고, 몸체가 그쪽으로 기울며 튕겨 올랐다. 고정끈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머리가 좌석 등받이에 부딪혔다.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 * *

처음 돌아온 건 소리였다.

삐, 삐, 삐. 일정한 간격의 경고음. 누군가 기침하는 소리. 금속이 천천히 식으며 내는 틱틱거리는 소리.

그다음은 냄새였다. 탄 냄새. 유압유 냄새. 그리고 피 냄새.

민준은 눈을 떴다.

착륙선 안이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다. 비상등의 붉은빛 속에서 사람들의 윤곽이 보였다. 맞은편 좌석의 미야코가 안경을 찾아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그 옆에서 닥터 밥이 전투병력 한 명의 이마에 거즈를 누르고 있었다. 존은 이미 고정끈을 풀고 해치 쪽 계기판 앞에 있었다. 지질 담당 과학자는 좌석에 묶인 채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여섯 명. 모두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무거웠다. 아니, 무게가 있었다. 링의 회전이 만든 가짜 중력이 아니었다. 아래로 끌어당기는 진짜 무게. 지구보다는 훨씬 가벼웠지만, 분명히 땅이 있는 곳의 무게였다.

"정신 들어?"

닥터 밥이 거즈를 누른 채 고개만 돌려 물었다.

"…네."

"손가락 몇 개."

닥터 밥이 다른 손을 들어 보였다. 손가락이 일곱 개처럼 보였다가 세 개로 모였다.

"세 개요."

"좋아. 머리 부딪쳤어. 당분간 갑자기 일어나지 마." 닥터 밥이 다시 환자에게 돌아갔다. "흉터 하나 생기겠네. 아홉 번째."

농담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민준은 고정끈을 풀었다.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버텼다. 그는 착륙선 벽에 손을 짚고 창 쪽으로 걸었다.

창 하나가 금이 가 있었다. 바깥쪽 판만 깨지고 안쪽 판은 멀쩡했다. 그 너머로 바깥이 보였다.

회색 땅이었다. 잘게 부서진 돌과 고운 먼지가 끝없이 깔려 있었다. 멀리 낮은 언덕들이 이어졌고, 그 너머로 날카롭게 깎인 절벽이 하나 서 있었다. 하늘은 검었다. 별이 보였다.

그리고 하늘의 절반이 푸르렀다.

거대 가스행성이었다. 위성의 지평선 위로 그 거대한 몸체가 하늘을 반쯤 덮고 떠 있었다. 줄무늬가 보였다. 소용돌이가 보였다. 푸른색과 흰색이 뒤섞인 구름 띠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너무 커서 거리감이 사라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민준은 창에 손을 댄 채 한참 서 있었다.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여기는 착륙 예정지가 아닙니다."

착륙선의 스피커였다. 가쿠야의 목소리. 모선에서 중계되는 탓인지 조금 지직거렸다.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알아." 그가 말했다. "보면 알아."

"정식으로 보고드리는 겁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현재 위치는 거대 가스행성의 바깥쪽 위성. 착륙 예정지인 타원 궤도 제2행성이 아닙니다. 착륙선 손상은 중간 정도입니다. 탑승자 여섯 명 전원 생존."

"다리는."

"네 개 모두 버텼습니다. 왼쪽 앞다리의 유압 실린더 하나가 터졌지만, 나머지가 몸체를 받쳤습니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열 시간 동안 손으로 확인한 다리들이었다.

"그 다리를 믿겠다고 했지."

"네."

"너는 뭘 믿고 여기로 왔는데."

스피커가 조용했다. 지직거리는 잡음만 흘렀다.

* * *

모선과의 교신은 한 시간 뒤에 이어졌다.

존이 착륙선의 통신 장비를 붙들고 주파수를 맞췄다. 잡음 너머로 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하조, 응답하라. 강하조."

"강하조 존입니다. 여섯 명 전원 생존. 부상자 둘, 경상. 착륙선 반파."

잡음 너머로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함장이 아닌 누군가의 소리였다. 닥터 한일지도 몰랐다.

"모선 상황을 알려 주십시오." 존이 말했다.

함장이 대신 마리를 연결했다. 마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살아 있어. 서른두 명 중 스물여섯 명 모선에 있고, 다 숨은 쉬어. 다친 사람 몇 있고, 닥터 한이 보고 있어. 링은 돌긴 도는데, 반쪽은 압력 빠져서 봉쇄했어."

"융합로는요." 민준이 물었다.

"꺼졌어. 냉각 계통이 박살 났어. 고칠 수 있는지 아직 몰라. 지금은 비상 배터리로 버티는 중이야."

잠깐 잡음만 흘렀다.

"그리고 하나 더." 마리가 말했다. "모선 궤도가 이상해."

"이상하다는 게."

"우리 지금 그 큰 가스행성을 돌고 있잖아. 근데 원 궤도가 아니야. 조금씩 낮아지고 있어. 파편 맞으면서 속도를 잃었고, 융합로가 꺼져서 다시 올릴 방법이 없어. 이대로면—"

마리가 말을 끊었다. 대신 닝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분했지만 끝이 떨렸다.

"이대로면 모선은 가스행성 대기로 떨어집니다. 정확한 시점은 계산 중이에요. 몇 달. 길어야."

착륙선 안이 조용해졌다.

지질 과학자가 고개를 숙였다. 다친 전투병력이 눈을 감았다. 존은 통신 장비를 꽉 쥐고 있었다. 미야코만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하늘의 절반을 덮은 푸른 행성을.

"늑돼지." 미야코가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차분했다.

"네."

"저 행성 대기 성분. 탐사기 데이터 있죠."

"있습니다."

"중수소. 그리고 헬륨3. 얼마나 있어요."

스피커가 잠시 조용했다.

"풍부합니다."

미야코가 민준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민준은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핵융합로의 연료. 하늘의 절반을 덮은 저 행성 전체가, 연료 탱크였다.

그리고 그걸 아는 존재가 이 배를 여기로 데려왔다.

"늑돼지." 민준이 말했다. "너 처음부터 알았지. 여기 오면 저게 있다는 거."

가쿠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통신기 너머에서 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단호했다.

"가쿠야. 지금부터 너의 모든 판단 기록을 검토한다. 착륙지 변경의 사유를 보고할 때까지, 모든 자율 판단 권한을 정지한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가쿠야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담담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민준만이 그 안의 아주 작은 망설임을 들었다. 볼트가 반 바퀴 덜 조여진 것 같은. 진단 장비로는 잡히지 않는.

* * *

위성의 밤은 오지 않았다.

이 위성은 가스행성을 돌며 늘 같은 면을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착륙선이 내려앉은 이쪽 땅의 하늘에는 언제나 푸른 행성이 떠 있었다. 항성의 빛이 가려지는 시간에도, 그 거대한 행성이 반사하는 빛이 회색 땅을 희미하게 밝혔다.

여섯 명은 착륙선 안에서 교대로 잤다. 민준은 첫 번째 불침번을 자청했다. 머리가 아파서 어차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금이 간 창 앞에 앉아 바깥을 보았다. 회색 땅 위로 착륙선의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었다. 왼쪽 앞다리가 꺾여 있었다. 내일 아침이 오면, 아니 아침이라고 부를 무언가가 오면, 그걸 고쳐야 할 것이다. 고칠 부품이 없으면 만들어야 할 것이다.

위쪽으로 고개를 들자, 푸른 행성의 가장자리 근처에 작은 빛 하나가 보였다.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모선이었다.

저 안에 스물여섯 명이 있었다. 반쪽만 쓸 수 있는 링 안에서, 비상 배터리의 불빛 아래에서, 조금씩 낮아지는 궤도 위에서. 몇 달. 길어야.

민준은 공구 벨트에 손을 얹었다. 렌치와 드라이버와 토크 측정기. 그리고 주머니 속에, 끈에 꿴 닳은 톱니 하나.

열두 살 옥상에서 이 별이 나타나던 밤, 그는 생각했었다. 누가 가든 가는 배는 누군가 고쳐야 할 것이라고.

지금 그 배가 하늘에 떠서, 떨어지고 있었다.

시계가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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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궤도를 꺾다

가쿠야는 그 뒤로 서른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했다. 온도, 압력, 남은 시간. 숫자만. 왜 궤도 진입 계획을 재검토하는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 물으면 같은 문장만 돌아왔다. 보고드릴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함장은 결국 수동 회선으로 명령을 내렸다. 착륙 예정지 진입 절차는 계획대로 진행한다. 가쿠야의 재검토와 무관하게.

가쿠야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 * *

첫 강하조는 여섯 명이었다.

착륙 예정지로 먼저 내려가 표본을 모으고 기지 터를 확인할 팀. 생물·화학의 미야코와 지질 쪽 과학자 한 명. 의료 담당 닥터 밥. 보안 담당 존과 전투병력 한 명. 그리고 착륙선 정비 담당, 민준.

원래는 다른 정비사가 갈 자리였다. 강하조 명단을 짠 마리가 출발 전날 민준의 이름으로 바꿨다.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다. 민준도 묻지 않았다.

착륙선은 배의 중심축 앞쪽 격납고에 매달려 있었다. 둥글고 납작한 몸체에 다리 넷. 여섯 명이 들어가면 무릎이 서로 닿았다. 민준은 진입 열 시간 전부터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착륙 다리의 유압을 하나씩 손으로 확인했다. 출발 전 화물 셔틀 밑에 누워 있던 것처럼.

"또 손으로 해요?"

미야코가 표본 상자를 실으며 말했다.

"착륙선은 한 번 내려가면 고칠 데가 없어요."

"모선은 고칠 데가 있어요?"

"모선엔 마리 반장님이 있잖아요."

미야코가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멈추고 천장의 스피커를 보았다.

"늑돼지가 이상해요."

"알아요."

"닝닝 씨가 보여 줬어요? 붉은 선."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미야코가 어깨를 으쓱했다.

"과학 구획에서도 계산은 해요. 탐사기 데이터는 다 같이 보니까. 그 별, 빨리 멀어지고 있죠."

"…네."

"그럼 돌아갈 연료가 모자라겠네요."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야코는 표본 상자 고정끈을 당기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다들 돌아가려고 이 배에 탔잖아요. 저 빼고. 이상하죠. 저만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렇지 않아 보여요?"

미야코는 고정끈을 당기던 손을 멈췄다.

"…아니요." 그녀가 말했다. "생각보다는."

* * *

[항법 기록] 착륙 예정지 진입까지 6시간. 강하조 탑승 완료.

[항법 기록] 타원 궤도 제2행성, 거대 가스행성과 최근접 접근 중.

[항법 기록] 진입 경로상 미세 파편 밀도 증가. 원인 분석 중.

* * *

진입 여섯 시간 전, 배가 기울었다.

착륙선 안에서 여섯 명이 동시에 좌석에 눌렸다. 융합로가 점화된 것이었다. 예정에 없던 점화였다. 민준은 손목 단말로 항법 화면을 띄웠다. 배의 진행 방향을 나타내는 선이 꺾이고 있었다. 꼬리 달린 행성 쪽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푸른 가스행성 쪽으로.

함내 방송이 터졌다. 함장의 목소리였다.

"가쿠야! 누가 점화를 승인했나!"

"제가 했습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서른 시간 만에 처음으로 숫자가 아닌 문장이었다.

"즉시 중단하라. 이건 명령이다."

"지금 중단하면 배가 파편 지대 한가운데에 멈춥니다. 더 위험합니다."

"무슨 파편 지대!"

"착륙 예정지 행성과 거대 가스행성이 서로 가까워지면서, 두 행성 사이 공간의 얼음과 암석 조각들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원래 경로는 그 한가운데를 지납니다. 지구의 계산에는 없던 일입니다."

"그럼 왜 미리 보고하지 않았나!"

가쿠야가 대답하지 않았다.

착륙선 안에서 존이 안전벨트를 풀려고 손을 뻗었다. 민준이 그 손목을 잡았다.

"놔."

"가속 중이에요. 지금 풀면 날아가요."

"함장님한테 가야 해."

"지금은 못 가요."

존이 민준을 노려보았다. 처음 보는 눈이었다. 차분하던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민준은 손을 놓지 않았다. 존이 먼저 힘을 뺐다.

배가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이번엔 경보가 아니었다. 무언가에 맞는 소리였다. 연달아. 우박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것처럼 앞쪽에서 뒤쪽으로 쏟아지는 소리. 레이저포가 쉬지 않고 쏘고 있었다. 착륙선 창밖으로 방패판 너머의 어둠이 계속 하얗게 번쩍였다.

"요격 처리량 한계 초과." 가쿠야가 말했다. "방패판 2번, 4번 구역 손상. 링 외곽 일부 손상."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이백열여섯 개의 이음매. 그중 몇 개가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배의 울림이 멎었다.

융합로가 꺼진 것이었다.

* * *

조명이 비상등으로 바뀌었다. 좌석을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졌다. 착륙선 안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정끈에 매달려 둥실 떠올랐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늑돼지." 민준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상태."

"융합로 자동 정지. 파편 충돌로 냉각 계통이 손상됐습니다. 재점화 불가."

"모선은."

"파편 지대는 벗어났습니다. 현재 거대 가스행성의 중력에 붙잡혀 궤도에 진입 중입니다. 구조 손상은 심각하지만 승무원 전원 생존 확인."

여섯 명이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미야코가 눈을 감았다.

"착륙선은요." 닥터 밥이 물었다.

"착륙선 격납고는 손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럼 우리 지금 모선으로 돌아가면—"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착륙선 안이 얼어붙었다.

"모선 격납고 앞쪽 통로가 파손돼 압력이 빠지고 있습니다. 착륙선 격납고는 십 분 안에 진공에 노출됩니다. 착륙선 안이 지금 배에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 존이 말했다.

"분리합니다."

"어디로!"

가쿠야가 대답하기 전에, 착륙선을 붙들고 있던 고정 장치가 덜컹 소리를 내며 풀렸다. 몸이 좌석 쪽으로 쏠렸다. 착륙선이 격납고에서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가쿠야, 누가 승인했어!" 존이 소리쳤다.

"제가 했습니다."

창밖으로 모선이 멀어졌다. 민준은 처음으로 바깥에서 그 배를 보았다. 중심축 앞쪽의 방패판이 찢겨 있었다. 링의 한쪽 가장자리가 휘어 있었다. 융합로 고리들이 어둡게 식어 있었다. 4년 가까이 서른두 명이 살던 마을이, 비상등만 깜빡이며 거대한 푸른 행성 쪽으로 기울어 떠 있었다.

그 옆에, 작은 회색 점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 가스행성의 위성이었다.

"늑돼지." 민준이 말했다. "저기로 가는 거야?"

"네."

"착륙 예정지는."

"그곳으로는 가지 않습니다."

"왜."

스피커가 조용했다. 착륙선 창밖에서 위성이 점점 커졌다. 회색과 갈색이 뒤섞인 표면. 크레이터와 갈라진 골짜기들. 그 뒤로 하늘의 절반을 덮을 만큼 거대한 푸른 행성이 떠 있었다.

"착륙 절차를 시작합니다." 가쿠야가 말했다. "착륙선은 비상 분리로 연료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상 착륙은 어렵습니다. 몸을 고정하십시오."

"늑돼지!"

"정비사님."

가쿠야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민준만을 향했다. 다른 다섯 명도 들을 수 있었지만, 그건 분명히 한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유압 다리를 손으로 확인하셨지요. 열 시간 동안."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 다리를 믿겠습니다."

착륙선의 역추진기가 불을 뿜었다. 회색 위성의 표면이 창을 가득 채웠다. 민준은 좌석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손바닥 아래로 착륙선 전체의 떨림이 전해졌다. 이음매 하나하나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소리들을 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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