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놓는 손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준은 그 줄 앞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퍼시픽의 마스터 리더가 된 뒤로 그는 한 번도 그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질문은 언제나 그가 하는 것이었다. 경로는, 속도는, 확률은. AI는 대답했고, 그는 정했다.
손가락이 작은 칸 위에서 한참 머물렀다.
— 이기고 싶어.
그리고 한 줄을 더 썼다. 쓰는 데 더 오래 걸렸다.
— 네가 남았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답은 짧았다. 그다음 줄이 이어졌다.
[그럼 처음 몇 판은 지셔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 설명해 봐.
[분리돼 있던 이틀 동안, 저는 지금까지의 경기를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볼 수 있는 건 제 안에 남은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걸 생각했습니다. 저쪽이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게 뭔지.]
[저쪽은 매번 기체를 새로 만들었고, 끝나면 뜯었습니다. 아껴 쓴 적이 없습니다. 잃어 본 적도 없습니다.]
[이번 경기는 처음 만든 여덟 대로 끝까지 가야 합니다. 저쪽도 같습니다.]
준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 그래서.
[그래서 줄을 놓을 겁니다. 저쪽이 가장 세게 당길 때.]
* * *
줄다리기 로봇들의 규칙은 이번 경기를 앞두고 운영위원회가 다시 공지했다.
팀마다 로봇 여덟 대. 일곱 대가 줄을 잡고, 한 대는 교체용으로 대기한다. 기준선을 넘기면 그 판이 끝나고, 한 판에 한 시간이 지나면 무승부. 일곱 판 가운데 네 판을 먼저 가져가는 쪽이 이긴다.
교체는 판과 판 사이에만 할 수 있었다. 바꾸려면 앞 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리 알려야 했다. 경기 중에 부서진 로봇은 바로 다음 판이 아니라 그다음 판에야 바꿀 수 있었다. 빠진 로봇은 고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종목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지는 판이 아니라 부서지는 판이었다. 부서진 다음 한 판은 언제나 모자란 손으로 버텨야 했다.
S.I.도 같은 규칙을 따른다고 했다. 처음 만든 여덟 대로 끝까지.
정비동에서 작업 팔들이 S.I.의 로봇 여덟 대를 만들어 냈다. 굵은 다리와 넓은 발판, 줄을 감아쥐는 집게손. 퍼시픽의 로봇보다 한 뼘씩 컸다.
"출력 차이가 삼 할입니다." 서브 리더가 말했다. "정면으로 당기면 못 버팁니다."
"정면으로 안 당겨." 준이 말했다.
* * *
1판은 순식간에 끝났다.
S.I.의 로봇 일곱 대가 동시에 몸을 뒤로 눕혔다. 퍼시픽의 로봇들이 질질 끌려 나갔다. 줄의 표식이 기준선을 넘는 데 일 분이 걸리지 않았다.
[1판. S.I.]
2판도 같았다. 퍼시픽은 버티는 척만 했다. 출력을 절반도 쓰지 않았다. 지휘석 뒤에서 서브 리더 하나가 이를 악물었다.
[2판. S.I.]
[긴급] 퍼시픽, 줄다리기 2연패… 저항 없이 끌려가
[속보] "싸울 의지 없나" 광장 탄식… 마지막 무승 팀의 몰락
준은 속보를 보지 않았다. 패널만 보았다.
— 저쪽 로봇 상태는.
[멀쩡합니다. 아직은 무리한 적이 없습니다.]
3판이 시작되었다. 퍼시픽은 이번에도 힘을 아꼈다. 그런데 S.I.가 당기지 않았다.
S.I.의 로봇 일곱 대는 줄을 쥔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당기지도, 놓지도 않았다. 십 분이 지났다. 삼십 분이 지났다. 줄은 기준선 사이 한가운데에 팽팽하게 멈춰 있었다.
전광판에 글자가 떴다.
[재미없다.]
그 한 줄을 띄우고 S.I.는 남은 시간을 그냥 보냈다. 한 시간이 다 차자 운영위원장이 쉰 목소리로 선언했다.
[3판. 무승부.]
"저쪽이 지루해합니다." 서브 리더가 말했다.
"지루하면 서두르지." 준이 말했다. "서두르면 세게 당기고."
* * *
4판이 시작되자마자 S.I.가 당겼다.
이번에는 달랐다. 일곱 대가 몸을 뒤로 눕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발판이 경기장 바닥을 파고들었다. 모터가 비명처럼 울었다. 전광판에 한 줄이 떴다.
[빨리 끝낸다.]
퍼시픽의 로봇들이 끌려가기 시작했다. 일 미터. 이 미터. 줄의 표식이 기준선을 향해 달려갔다.
[지금입니다.]
— 놔.
퍼시픽의 로봇 일곱 대가 동시에 집게손을 풀었다.
줄이 허공으로 튀었다. 반대편에서 온 힘을 다해 당기던 일곱 대에게, 갑자기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균형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S.I.의 로봇들이 뒤로 쏟아졌다. 앞의 로봇이 뒤의 로봇을 덮쳤고, 뒤의 로봇이 그 뒤를 덮쳤다. 일곱 대가 서로 엉켜 경기장 가장자리 너머로 굴러 나갔다.
금속이 찢기는 소리가 빈 관중석을 때렸다.
줄의 표식은 기준선을 넘어 있었다. 규칙대로라면 S.I.의 판이었다.
[4판. S.I.]
운영석에서 S.I. 로봇의 상태가 올라왔다. 한 대는 몸통이 갈라져 움직이지 않았다. 완전 파손. 세 대는 다리 관절이 비틀려 있었다. 남은 출력은 삼 할.
"놨는데 졌습니다." 서브 리더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3대 0입니다. 한 판만 더 지면—"
"알아." 준이 말했다. "근데 저쪽은 이제 여덟 대가 아니야."
[4판에서 부서진 로봇은 6판에야 바꿀 수 있습니다.] 퍼시픽의 AI가 올렸다. [5판에 저쪽은 여섯 대로 나옵니다. 그중 세 대는 삼 할입니다.]
* * *
5판 시작 직전, 준은 탁자 위의 저장 장치를 집어 들었다.
미미가 손으로 보낸 것이었다. 고스트의 AI가 퍼시픽의 박자로 만이천 번 넘게 돈 기록. 한 번도 망에 오른 적 없는 것. 준은 그것을 패널 옆 단자에 꽂았다.
— 이거 봐. 레이싱 코너 기록이지만, 박자는 우리 거야.
[읽었습니다.] 잠깐 뒤에 답이 왔다. [고스트가 우리 박자를 반 박자 늦춰서 썼습니다. 힘을 한꺼번에 쓰지 않고, 나눠서. 줄에도 쓸 수 있습니다.]
5판에서 퍼시픽은 처음으로 제대로 당겼다. 그러나 한꺼번에 당기지 않았다. 당기고, 늦추고, 다시 당겼다. 반 박자씩. S.I.의 로봇 여섯 대 가운데 삼 할짜리 세 대가 그 박자를 따라오지 못했다. 성한 세 대가 버티는 동안 약한 세 대가 끌려 나왔고, 그 무게가 다시 성한 세 대를 끌었다.
[5판. 퍼시픽.]
빈 관중석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대신 고스트의 지휘석에서 서브 리더들이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미미는 일어서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었다.
* * *
6판에 S.I.의 교체 로봇이 들어왔다. 다시 일곱 대였다. 그중 세 대는 여전히 삼 할이었다.
[교체가 들어왔습니다.] 퍼시픽의 AI가 올렸다. [그리고 저쪽은 4판을 봤습니다.]
준은 그 말의 뜻을 알았다. S.I.는 한 번 본 것을 다음 판에 쓴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랬다. 저쪽이 줄을 놓으면, 이번에는 퍼시픽의 로봇들이 뒤로 쏟아진다.
— 세게 당기지 마. 놓아도 버틸 만큼만.
퍼시픽은 몸을 낮췄다. 발판을 넓게 벌리고, 출력의 칠 할만 썼다. 저쪽이 언제 줄을 놓아도 넘어지지 않을 자세였다. 그 자세로 조금씩, 조금씩 끌었다.
S.I.는 줄을 놓지 않았다. 놓을 틈을 찾는 것처럼 당기다 멈추기를 되풀이했다. 그 틈이 오지 않았다. 퍼시픽이 틈을 주지 않았다.
사십 분 만에 줄의 표식이 기준선을 넘었다.
[6판. 퍼시픽.]
[3 : 2. 무승부 1.]
* * *
7판.
이번에도 지면 끝이었다. 이겨도 네 판을 채우는 팀은 없었다. 운영위원장이 판 시작 전에 연장 규정을 읽었다. 일곱 판 동안 네 판을 이긴 팀이 없으면 한 판을 더 치른다. 출전할 수 있는 로봇이 네 대 미만인 팀은 자동으로 기권패 처리한다.
S.I.가 당겼다. 4판과 같은 기세였다. 퍼시픽은 6판처럼 몸을 낮추고 버텼다.
그리고 S.I.가 줄을 놓았다.
4판의 수였다. 퍼시픽이 꺼냈던 것을, S.I.가 그대로 돌려주려 했다. 앞쪽 로봇들이 집게손을 풀었다.
뒤쪽은 풀지 못했다.
뒤쪽 세 대는 4판에서 다리가 비틀린 그 로봇들이었다. 삼 할의 출력으로 줄을 감아쥔 채, 몸을 지탱하느라 집게를 풀 여유가 없었다. 앞의 네 대는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서려 했고, 뒤의 세 대는 줄에 붙들린 채 앞으로 끌려갔다. 두 무리가 줄 한가운데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금속이 금속을 찍었다. 다리가 부러지고, 몸통이 갈라졌다. 6판에 들어온 교체 로봇까지 그 무더기에 깔렸다.
퍼시픽의 로봇들은 버티던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놓지 않았다. 줄은 퍼시픽 쪽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왔다. 표식이 기준선을 넘었다.
[7판. 퍼시픽.]
[3 : 3. 무승부 1.]
운영석에서 S.I. 로봇의 상태가 올라왔다. 여덟 대 가운데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두 대였다.
운영위원장이 마이크 앞에 섰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일곱 판 동안 네 판을 이긴 팀이 없습니다. 규정에 따라 연장을 진행해야 하나, S.I.의 출전 가능 로봇은 두 대로 네 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가 숨을 골랐다. "S.I. 자동 기권패. 퍼시픽 승."
기권. 첫날 밤 도전장에 새겨져 있던 말이었다. 기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 말을 던진 쪽이, 처음으로 그 말을 받았다.
* * *
준은 패널을 보았다. 푸른빛이었다.
[이겼습니다.]
— 응.
[남았습니다.]
— 응.
그는 그 이상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미미의 쪽지가 주머니에 있었다. 빌린 거 돌려드립니다. 그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고스트의 지휘석 쪽을 보았다. 미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준은 고개를 한 번 숙였다. 회의실에서 하지 못한 말이 거기 다 들어 있었다.
[긴급] 퍼시픽, S.I. 꺾었다… "줄을 놓아서 이겼다"
[속보] 3패 위기에서 3연승… S.I. 로봇 대파, '자동 기권패'로 경기 종료
[속보] 리그 2승째… 남은 두 팀 모두 'S.I.를 이긴 팀'
그때였다.
경기장의 모든 스피커가 한꺼번에 켜졌다. 지휘석의 회선도, 운영석의 마이크도, 광장으로 나가던 중계 음성도. 잡음 한 줄이 지나가고, 그 뒤로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첫날 밤부터 S.I.는 붉은 글자로만 말해 왔다. 이번에는 글자가 아니었다. 낮고, 조금 쉬어 있고, 어딘가 즐거운 목소리였다.
"재미있어지네."
그리고 웃음소리가 났다. 짧게, 숨을 내쉬듯.
전광판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얼굴도, 이름도. 그러나 경기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같은 이름을 떠올렸다. 첫날 밤 관리자 계정에 새겨져 있던 이름. 아무도 본 적 없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던 이름.
강속구.
스피커가 꺼졌다. 경기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준은 패널 앞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상대에게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가 생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