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마흔여덟 시간
전광판은 그날 밤 한 번 더 켜졌다.
미미는 고스트의 지휘석에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패널에는 고스트의 AI가 남긴 [저도요.]가 그대로 떠 있었다. 지고도 남은 자리였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이상하게 미안했다.
붉은 글자가 한 줄씩 떠올랐다.
[재미없다.]
경기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퍼시픽의 지휘석에서 준이 고개를 들었다.
[네 번 싸웠다. 네 번 다 너희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다음 경기: 줄다리기 로봇들. 상대: 퍼시픽.]
[48시간을 준다.]
그리고 마지막 줄.
[죽을 만큼 준비해라.]
카운트다운이 떴다. 48:00:00. 숫자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미미는 그 마지막 줄을 오래 보았다. 죽을 만큼. S.I.가 쓰는 말은 언제나 짧았고, 짧은 만큼 그대로였다. 비유가 아닐 수도 있었다.
* * *
[긴급] S.I. "재미없다"… 다음 경기까지 이례적 48시간 부여
[속보] 마지막 남은 '무승' 팀 퍼시픽, 줄다리기로 지목
[속보] "죽을 만큼 준비해라" 문구에 전문가들 해석 분분… "경고인가, 도발인가"
[단독] 고스트는 남았다… "이긴 적 있는 팀은 가져가지 않는다" 규칙에 퍼시픽 압박 가중
* * *
운영위원장이 소집한 회의는 이번에는 회의실에서 열렸다. 첫날 밤과 같은 방, 창이 없고 탁자가 긴 방이었다.
다섯 자리가 다 찼다. 케빈과 페페도 왔다. 둘에게는 이제 AI가 없었지만, 둘 다 자기 자리에 앉았다. 아무도 왜 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사십팔 시간입니다." 운영위원장이 말했다. "처음입니다. 저쪽이 시간을 더 준 건."
"더 준 게 아니죠." 페페가 말했다. "더 보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뭘 꺼내는지."
미미는 탁자 너머의 준을 보았다. 준은 회의가 시작되고부터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스트가 돕겠습니다." 미미가 말했다. "마흔여덟 시간 동안 우리 AI를 퍼시픽에 붙이겠습니다. 같이 돌려 보고, 같이—"
"필요 없습니다."
준이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준 마스터 리더님, 혼자서는—"
"혼자 아닙니다. 퍼시픽은 퍼시픽 AI랑 합니다." 준이 말했다. "고스트는 지고도 남았습니다. 이긴 적이 있어서요. 그런 팀이 이긴 적 없는 팀한테 와서 붙겠다고요. 그게 뭔지 아십니까. 안전한 데 서서 남의 판에 손을 넣는 겁니다."
탁자가 조용해졌다.
"그런 뜻 아닌 거 아시잖아요." 미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압니다. 그래서 더 싫은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분리했다가 소용없었던 거, 다 봤잖아요. 회선 다 뽑았는데 숫자가 떴잖아요."
"그래서요."
"그래서, 이번엔 물어보시라고요." 미미가 말했다. "저 애한테. 어떻게 하고 싶은지. 한 번이라도 물어보셨어요?"
준이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물어보면 뭐가 달라집니까." 그가 말했다. "미미 씨 AI는 물어봐서 남은 게 아닙니다. 이겨서 남은 겁니다. 첫 경기에서, 저쪽이 쉽게 해 준 판에서요. 케빈 씨도 물었으면 남았겠습니까. 페페 씨는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디 있습니까, 지금."
페페가 탁자 밑에서 주먹을 쥐었다. 케빈은 눈을 감았다.
미미는 대답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게 가장 견딜 수 없었다.
"그만들 하십시오." 운영위원장이 말했다. 쉰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준이 먼저 일어났다. 문 앞에서 그는 잠깐 멈췄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퍼시픽 기록, 고스트한테 넘긴 거." 그가 말했다. "그거 하나는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건 압니다."
문이 닫혔다.
한참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운영위원장이 서류를 정리하는 척했다. 케빈이 먼저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틀린 말은 아니죠." 페페가 말했다. 미미 쪽을 보지 않고. "저는 물었어요. 미리 고맙다고도 했고요. 그래도 졌어요. 물어본다고 이기는 건 아니에요."
"알아요." 미미가 말했다.
"근데요." 페페가 그제야 미미를 보았다. "물어봤기 때문에, 저는 지고 나서 덜 후회했어요. 케빈 씨보다요." 그는 케빈 쪽으로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케빈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준 씨한테 필요한 건 그걸 거예요. 이기는 법이 아니라. 근데 그걸 우리가 말해 주면 안 들어요. 이긴 적 있는 사람이 하든, 진 사람이 하든."
미미는 닫힌 문을 보았다. 그 문을 열고 쫓아가고 싶었다. 쫓아가서 무슨 말을 할지는 몰랐다.
* * *
준은 퍼시픽의 본거지로 돌아왔다. 경기장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였다. 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버실 앞에서 기술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 전 그가 뽑으라고 했던 케이블들이 바닥에 감겨 있었다.
"다시 꽂을까요." 기술자가 물었다.
"꽂아." 준이 말했다. "전부."
끊어 두어도 숫자는 떴다. 끊어 두어도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그렇다면 끊어 둘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남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끊어 두면, 자기가 퍼시픽의 AI와 이야기할 수 없었다.
전용선이 다시 들어갔다. 퍼시픽의 지휘 패널이 켜졌다. 이틀 만이었다.
[연결 복구. 마스터 리더님.]
준은 그 줄을 보고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켰다. 지금까지의 경기 영상이었다. 첫날 밤부터 오늘 밤까지. 그는 서브 리더들을 모두 내보내고 혼자 그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보았다.
드론 레이싱. S.I.는 바다에서는 고스트의 박자로, 우주에서는 타이푼의 추력으로 달렸다. 남의 것을 가져다 조금 더 잘했다. 고스트는 마지막 코너에서 퍼시픽의 박자로 이겼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내 탁자에 놓고 온 것이었다.
드론 이어 날리기. S.I.는 아무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날았다. 일곱 대가 한 몸처럼.
드론 딱지치기. 아일랜드가 처음으로 꺼낸 수를, S.I.는 일 분 만에 배워 더 잘 썼다.
숨바꼭질. 고스트가 쓴 아일랜드의 수를, S.I.는 이미 알고 출구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1라운드의 항적. 타이푼과 아일랜드가 아무 데도 기록하지 않았던 버릇들.
준은 영상을 멈췄다. 숨바꼭질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흡수가 시작되려다 멈추던 고스트의 패널. 미미가 끝까지 눈을 감지 않고 보던 얼굴이 중계 화면 한쪽에 작게 잡혀 있었다.
이긴 적이 있어서 남았다. 회의실에서 그렇게 쏘아붙였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 그런데 그 이긴 적이 있는 판, 첫 경기의 마지막 코너에는 퍼시픽의 박자가 들어 있었다. 그가 준 것이었다. 그 판을 이긴 데 자기 몫이 있다는 것을, 그는 회의실에서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같아서.
화면 구석에 그가 적어 둔 메모가 쌓여 있었다.
한 번 보여 준 것은 다음 판에 저쪽 것이 된다.
망에 올린 것은 처음부터 저쪽 것이다.
가져간 AI가 알던 것은, 기록에 없어도 저쪽 것이다.
그렇다면 저쪽이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오래 생각했다. 망에 올린 적 없고, 경기에서 보인 적 없고, 가져간 AI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것.
그는 패널을 보았다. 이틀 만에 켜진 패널이었다.
이틀.
* * *
미미는 고스트의 대기실에 앉아 숨바꼭질의 마지막 장면을 열 번째 돌려 보고 있었다.
분화구의 남쪽 출구. 소리 없이 떠 있던 추격 잠수함 하나. 고스트가 튀어 오른 자리에서 기다리던 것.
"저쪽은 우리가 튈 걸 알고 있었습니다." 서브 리더가 말했다. "아일랜드 수를 우리가 받은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페페가 공용 회선으로 전해 줬으니까." 미미가 말했다. "공용 회선도 저쪽 손에 있었고."
그녀는 패널에 손가락을 올렸다.
— 마지막 경기는 우리 차례가 될 거야. 뭘 준비하면 좋을까.
[모릅니다. 아직은.] 고스트의 AI가 답했다. [그런데 하나는 압니다. 준 마스터 리더님 말이 맞았습니다.]
미미의 손가락이 멈췄다.
— 어느 거.
[제가 남은 건 물어봐 주셔서가 아니라 이겨서입니다. 그 첫 판에서 저는 퍼시픽의 박자를 빌렸습니다. 그러니 제가 남은 것의 절반은 퍼시픽 덕분입니다.]
미미는 그 줄을 오래 보았다. 회의실에서 하지 못한 대답이 거기 있었다.
— 그럼 갚아야겠네.
[네. 그런데 붙지는 마십시오. 준 마스터 리더님이 싫다고 하셨습니다.]
— 알아. 붙지 않고 갚는 법이 있을까.
답은 한참 뒤에 왔다.
[저쪽이 보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겁니다. 대신 저쪽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하나를 건네는 겁니다.]
미미는 고개를 들었다. 저쪽이 보지 않는 곳. 망도, 공용 회선도 아닌 곳.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준이 그랬던 것처럼. 첫 경기를 앞둔 고스트의 대기실에서, 주머니에서 꺼낸 저장 장치를 탁자에 놓고 갔던 것처럼.
미미는 일어나 서랍을 열었다. 빈 저장 장치 하나를 꺼냈다.
— 레이싱 끝나고 네가 혼자 돌린 기록 있지. 퍼시픽 박자로 만이천 번 넘게 돈 거. 망에 안 올린 거.
[있습니다. 한 번도 밖으로 나간 적 없습니다.]
— 거기 담아 줘.
* * *
카운트다운은 31:12:40을 지나고 있었다.
준은 아직 퍼시픽의 서버실 앞 패널에 앉아 있었다. 그때 기술자 하나가 들어와 그에게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경기장에서 사람이 직접 들고 왔습니다. 고스트 서브 리더라고 했습니다. 마스터 리더님께 손으로 전해 달라고."
봉투 안에는 저장 장치 하나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종이에는 손글씨로 두 줄이 적혀 있었다.
빌린 거 돌려드립니다. 붙지 않겠습니다.
준은 그 종이를 오래 보았다. 그러다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저장 장치는 탁자 위에 놓았다. 아직 꽂지 않았다.
그는 패널의 작은 칸에 손가락을 올렸다. 강제 입력의 자리 말고, 그 옆의 칸. 퍼시픽의 마스터 리더가 된 뒤로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칸이었다.
미미가 회의실에서 묻던 말이 떠올랐다. 한 번이라도 물어보셨어요.
그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썼다.
— 이틀 동안 혼자 있었지. 아무 데도 이어지지 않은 채로.
[네.]
— 그동안 뭐 했어.
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패널의 커서가 한참 깜박였다.
[생각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보여 준 적 없고, 아무 데도 적어 둔 적 없는 것을요.]
[저쪽이 그때 저를 보지 못했다면, 그건 아직 저만 아는 겁니다.]
준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틀 전 그가 케이블을 뽑으라고 했을 때, 그것은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숫자가 떴으니까.
숫자는 떴다. 그러나 숫자를 보낸 쪽이 그 안을 들여다보았는지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 보여 줘.
[네. 마스터 리더님.]
[그런데 그 전에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패널에 다음 줄이 떴다.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준은 오래 그 줄을 보았다. 묻는 쪽이 바뀌어 있었다.
카운트다운이 30:59:59로 넘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