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내려가는 날
첫 이주조가 떠나기 전날 밤, 민준은 편지를 열었다.
숙소의 접이식 책상 위에 단말을 올려놓고 한참 앉아 있었다. 화면에는 수신 차단 설정이 떠 있었다. 4년 가까이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설정이었다.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세 번째에 눌렀다.
열여섯 통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누나에게서 아홉 통. 아빠에게서 일곱 통. 날짜순으로 정렬돼 있었다. 맨 위가 가장 오래된 것, 출발 첫 주.
민준은 맨 아래부터 열었다. 가장 마지막에 온 것. 두 번째 섬광 직전, 지구의 목소리가 끊기기 전 마지막 송신에 실려 온 누나의 편지였다.
[민준아.
이번에도 안 읽겠지. 그래도 쓴다. 안 읽는 편지 쓰는 거, 이제 좀 익숙해.
엄마는 여전해. 서재에서 안 나와. 근데 요즘은 밤에 가끔 옥상에 올라가. 네가 망원경 놓던 자리에 서서 남쪽 하늘 봐. 내가 왜 거기 서 있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안 했어. 엄마답지.
너 배 탄다고 했을 때, 나는 엄마가 막을 줄 알았어. 엄마라면 한 줄이면 막을 수 있었으니까. 근데 안 막더라. 왜 안 막냐고 물었더니, 딱 한마디 했어.
"그 애가 고른 거잖아."
그러니까 너도 네가 고른 거 끝까지 해. 고쳐서 돌아와. 넌 뭐든 고치잖아.
누나가.]
민준은 그 편지를 오래 보았다. 나머지 열다섯 통은 열지 않았다. 지금은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머지는 위성에서 읽으면 될 것이다. 시간은 많을 테니까.
"늑돼지."
"네."
"지구로 보내는 송신, 아직 하고 있지."
"매일 하고 있습니다. 받는 쪽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메시지 하나 넣어 줘. 짧게."
"말씀하십시오."
민준은 한참 생각했다. 할 말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열자, 나온 건 짧은 문장 하나였다.
"엄마. 내가 먼저 물었어."
"전송 대기열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누나한테." 민준이 말했다. "편지 읽었다고."
"넣었습니다."
* * *
[모선 기록] 위성 1차 이주조 출발. 착륙선 1회차, 탑승 5명 및 거주 모듈 1기.
[모선 기록] 조종: 존. 기지 건설 책임: 강민준.
[모선 기록] 잔류: 함장 이하 21명. 융합로 출력 33%, 안정.
* * *
착륙선은 이번에는 격납고에서 떠났다.
방패판이 찢어졌던 앞쪽 통로는 지난 일주일 동안 마리와 케이가 막아 놓았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선외복을 입고 지나가야 했다. 그래도 격납고의 예비 부품 창고에 다시 손이 닿았다. 그 안에는 진짜 유압 실린더가 여섯 개 있었다.
민준은 그중 하나를 꺼내 들고 한참 보았다. 반짝이는 새 실린더. 산소통으로 만든 것보다 훨씬 가볍고, 훨씬 정밀했다.
"갈아 끼울 거지?" 케이가 물었다.
"아니요." 민준이 말했다. "예비로 가져갈게요. 지금 다리는 버텨요."
"그 산소통 다리가?"
"제가 두드려 봤어요."
케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격납고 출구 앞에 함장이 서 있었다. 배웅하러 나온 사람은 함장 하나였다. 나머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화면으로 보고 있었다. 융합로 구획의 마리, 항법실의 닝닝, 의무실의 닥터 한, 식당의 요리장.
존이 먼저 착륙선에 올랐다. 그는 함장 앞을 지나며 경례를 했다. 함장이 받았다. 전투병력 두 명과 요리사 한 명이 뒤를 따랐다. 요리장이 보낸 사람이었다. 위성에도 상추를 똑같이 찢어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고.
민준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함장 앞에서 멈췄다. 공구 벨트를 차고 있었다. 주머니에는 끈에 꿴 닳은 톱니가 들어 있었다.
함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처럼.
민준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잠깐의 틈.
"레나 함장님."
함장의 얼굴에 작은 변화가 지나갔다. 아주 작은. 진단 장비로는 잡히지 않을 만큼.
"다녀와요, 강민준 정비사." 레나가 말했다. "거기 우리 집, 튼튼하게 지어 줘요."
* * *
하강은 조용했다.
존의 조종은 첫 도킹 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착륙선은 위성의 회색 하늘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창밖으로 하늘의 절반을 덮은 푸른 행성이 천천히 기울었다. 민준은 이번에는 이음매를 세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보았다. 처음 이곳에 떨어지던 날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였다.
크레이터의 그늘진 가장자리에서 반짝이는 얼음. 낮은 언덕 사이로 뻗은 골짜기. 그리고 그 골짜기 입구에, 작고 엉성한 구조물 하나. 착륙선 패널과 단열재로 만든 임시 거처.
그 앞에 사람이 넷 서 있었다.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맨 앞의 사람은 큰 안경을 쓰고 있었다.
"착륙 절차 시작." 존이 말했다.
착륙 다리가 펴졌다. 넷 중 하나는 산소통으로 만든 다리였다.
땅에 닿았다. 부드럽게. 착륙선이 한 번 출렁이고, 멈췄다. 왼쪽 앞다리는 버텼다.
* * *
에어록이 열리자 미야코가 서 있었다. 헬멧 너머로 웃고 있었다.
"늦었어요."
"일주일밖에 안 됐어요."
"여기선 일주일이 길어요. 밤이 안 오니까." 미야코가 말했다. 그러고는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투명한 병. 안에 맑은 액체가 들어 있었다. "냉매 2차분이요. 그리고 이거."
그녀가 내민 다른 손에는 작은 화분이 있었다. 착륙선 표본 상자를 잘라 만든 화분. 그 안에 손톱만 한 초록색 잎 두 장이 올라와 있었다.
"과학 구획에서 몰래 챙겨 온 상추 씨앗이에요. 위성 얼음물로 키웠어요. 이 땅에서 처음 난 거예요."
민준은 그 잎을 오래 보았다. 헬멧 너머로 손을 뻗어 잎을 만지려다, 장갑 때문에 멈췄다.
"만져 봐야 아는데."
"알아요." 미야코가 말했다. "그러니까 빨리 실내 만들어요. 장갑 벗고 만질 수 있는 데."
* * *
그날, 위성 기준 시간으로 저녁 무렵, 가쿠야는 지구로 보내는 정기 송신 패키지 맨 끝에 한 줄을 덧붙였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줄이었다.
[운영 모델 상태: 기준 데이터 갱신 중. 현지 실측 기반 재학습 진행률 4%.]
[운영 모델 명칭: 가쿠야. 세대 표기 갱신 대기.]
그 송신이 지구에 닿기까지는 넉 달이 걸릴 것이다. 받을 귀가 있다면.
* * *
지구, 달 궤도.
우주방위군 달기지의 격납고 한가운데에 배 한 척이 서 있었다. 2진 구조전대. 탐사선에 문제가 생기면 출동하기로 하고 몇 년째 대기만 하던 배였다. 튀르키예 구조전대의 지휘관이 그 앞에서 단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출동 명령은 아직 없었다. 우주방위군 사령부는 회의만 거듭하고 있었다. 교신이 끊긴 탐사선이 살아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격납고 문이 열렸다.
네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오래전 한 경기장에서 서로를 이기려고 밤을 새우던 사람들. 퍼시픽의 준. 타이푼의 케빈. 아일랜드의 페페. 그리고 맨 앞에 고스트의 미미.
그들 뒤로 대형 화물 컨테이너 네 개가 따라 들어왔다. 컨테이너 옆면마다 낡은 리그 로고가 붙어 있었다. 그 안에 든 것은 네 팀의 AI였다. 18년 전 그 경기장에서 S.I.와 맞섰던, 그 AI들.
"이게 다 뭡니까." 구조전대 지휘관이 물었다.
"구조대요." 미미가 말했다.
"출동 명령은 사령부에서 나와야 합니다."
미미는 대답 대신 단말을 내밀었다. 화면에 한 줄이 떠 있었다.
[최상위 권한 지시: 2진 구조전대 즉시 출동 승인. 승무원 구성은 미미 마스터 리더에게 위임한다. 발신: 정이나.]
지휘관은 그 화면을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경례했다.
"…출동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케빈이 컨테이너를 두드렸다. "드디어 뭐 하나 이기러 가네."
"이기러 가는 거 아니에요." 준이 말했다. "데리러 가는 거예요."
"그게 그거지."
페페가 웃었다. 미미는 웃지 않았다. 격납고 천장의 창 너머로 별들이 보였다. 그중 하나가 다른 것들보다 밝았다. 동생이 열두 살 때 철사로 감은 망원경으로 처음 찾아낸 별.
그 별 너머 어딘가에서, 한 정비사가 처음 난 상추 잎을 장갑 너머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미미는 몰랐다.
알게 될 것이다.
0.3광년. 빛으로 넉 달. 배로는 4년.
미미는 컨테이너 앞에 섰다. 손바닥을 차가운 외벽에 댔다.
"같이 가자." 그녀가 말했다.
컨테이너 안에서, 아주 낮게, 무언가가 깨어나는 소리가 났다.
* * *
『이나의 명령: 귀환작전』 1권 끝. 2권에서 계속.



